익히고 익어간다는 것

2023년 10월 17일 / 박노해 [너의 하늘을 보아]

by 글방구리
지는 게 이기는 거란다


지는 게 이기는 거란다

꽃이 아름다운 건
지는 때가 있기 때문이란다

꽃이 지면 그 자리에
눈부신 열매가 익어간단다

그악스레 지지 않으려 하면
스스로 짓이겨질 뿐이란다

이제 져야 할 때이다
한번 비워야 할 때이다

나 기꺼이 떨어져
가없이 피어온 저 꽃들처럼

지는 꽃이 돋아 눈부신 결실을
그 열매가 묻혀 새로운 꽃들을

지는 게 이기는 거란다

박노해 [너의 하늘을 보아] '지는 게 이기는 거란다' 전문

에세이는 봄이다.

어떤 모양으로 돋아나도 제각기 다 사랑스러운 풀꽃 같다.


소설은 여름이다.

뜨거운 햇볕을 견디며 한걸음 두 걸음 걸어가며 읽는다.


시는, 가을이다.

열매 안에 봄 여름이 다 들어 있다.

작아도 작지 않은 생명,

짧아도 짧지 않은 이야기가 들어 있다.


익히고 익어간다는 것,

가을에만 할 수 있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