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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은 어떤 사람이 될래?

열두 살 아이들이 [열두 살 장래 희망]을 써 보다

by 글방구리

지난 1월 말. 5학년 글쓰기 수업 마지막 날에 아이들과 도서관에 갔다. 6학년 수업은 내가 고른 책과 아이들이 고른 책을 골고루 섞어보자는 마음에서 책을 골랐다. 길게 머물지 못하고 슬쩍 훑어보고 고른 책들이라 깊은 내용을 알 수 있겠느냐마는, 그래도 나올 때는 아이들 각자의 관심과 특성이 드러난 도서 목록을 손에 쥘 수 있었다.


판타지 소설을 좋아하는 아이, 환경 도서를 선호하는 아이, 분명히 제목만 보고 골랐음직한 아이, 동물 관련 도서를 고른 아이, 조금 수준이 높아 보이는 책을 고른 아이, 세 권이라는 최저 개수를 맞추기 힘들어하는 아이, 반면에 너무 많이 골라와서 제목을 베껴 적기도 버거웠던 아이.


나는 마치 메뉴를 정하지 않고 재래시장에 가서 눈에 보이는 대로 시장바구니 가득 사다 놓고 그때부터 뭘 만들지 고민하는 요리사처럼 긴 목록을 훑어보며 수업을 어떻게 진행할까 구상하는 중이다. 이번 달에는 아이들이 금방 읽기 쉬운 판타지 소년소설은 돌려가면서 읽어오도록 했고, 챕터가 나뉜 과학책은 발제 없이 시간을 두고 돌려 보라고 했다.


오늘은 그중에서 시현이가 골라온 [열두 살 장래희망](박성우 글, 홍그림 그림/ 창비/ 2021)을 교재로 글쓰기를 하는 날이다. 이 책은 '장래희망'이라고는 하지만, 희망을 직업에 맞추지 않고 '어떤 사람으로 살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아이들에게 목차를 읽어주었다. 장래 희망이라고 하기에는 어딘지 어색한 것, 왜 그게 장래 희망일 수 있는지 감이 잘 안 잡히는 부분을 짚어 보라 했다. '잘 우는 사람'을 택한 아이가 많다.

'그래.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고, 울 만한 일에 함께 우는 게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지를 알기에 너희들은 너무 어리지.'


목차 중에서 팁을 얻어도 되고, 목차에 없지만 자기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생각나는 대로 써도 된다고 말해 주었다. 직업을 갖고 일하는 동안만 아니라, 예문을 읽은 것처럼 일생을 통해 되고 싶은 모습을 상상해 보라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지금뿐 아니라 미래에도 내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좋겠다. 책을 읽으면 다양한 문장을 접해 문해력도 높아지고, 재미있는 상상을 많이 할 수 있다. 내가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고, 어른이 되어서 할 일이 많아져도 다양한 책을 접하고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어른이 되어 아이도 생기고 손자도 생기게 되면, 그때는 내가 좋아하는 책을 아이들에게 읽어주고 이야기도 나누고 싶다. 아이들도 그러면 책의 즐거움을 알고 좋아하게 되겠지. 미래에 전자책이 많이 생기고 다른 사람들이 많이 읽는다 해도 내 주변 사람들은 재미있고 오래 쳐다볼 수 있는 종이책을 읽으면 좋겠다. 나는 책을 즐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재우)

*재우야, 할아버지가 된 네가 곁에 손주들을 앉혀 놓고 책을 읽어주는 모습을 상상하게 되는구나. 특히 책을 즐기고 싶다는 말이 입시라는 괴물에게 잡아먹히지 않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나는 다리가 튼튼한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여행 갈 때 조금만 걸으면 다리가 아프다. 엄마는 여행 가서도 3시간을 걸어도 지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걷고 싶어 하셨다. 나는 그게 너무 존경스러웠다. 하지만 그러려면 많이 걷고 힘들다는 생각부터 버리는 게 좋을 것 같다. 저번에 엄마에게 비법을 물어봤는데 재미있다는 생각을 가지라고 하셨다. 그러니 운동을 열심히 하면서 재밌다라는 생각을 가져야겠다. 많이 연습하면 다음 여행에는 꼭 그런 마음을 가져야겠다.

나는 평생 어린이의 마음을 가지고 싶다. 어른이 되면 동심을 잃을 것 같아서 걱정이 된다. 계속 재밌는 삶을 살고 싶다. 뽀로로를 좋아하고 예쁜 상상을 하는 그런 어른이 되고 싶다. 무려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재미있는 상상을 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나는 재밌는 상상을 하는 게 좋다. 그러니 나는 동심을 잃지 않는 멋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영범)

*영범이는 두 가지 희망을 썼다. 영범이가 아들 셋 중의 가운데라 그런지, 언제나 부처님 가운데토막처럼 부드럽고 따뜻하다고 생각했는데, 본인 스스로도 동심을 잃기 싫다고 한다.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지날 때도 그 꿈이 상처받지 않기를.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내가 20살이 되든, 할아버지가 되든 하고 싶은 걸 모두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왜냐하면 나는 돈 걱정 같은 걸 하지 않고 취미 생활을 하며 오락을 즐기는 사람이 부럽고 낭만적인 것 같기 때문이야. 밖에 나가고 싶거나 게임을 하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릴 때 일을 미룰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조금 죄책감 없어 보일 것 같으면, 꼭 할 일은 하는 너무 어린이 같지는 않은 사람일 거야. 나중에 아빠, 할아버지가 되면 아들, 손주랑 게임 한 판 하는 사람이 될래. 그럼 나는 계속 재미있는 삶을 살아가겠지?(율민)

*와, '하고 싶은 걸 하는 사람'이라니. 정말 원대하고 야무진 꿈이다. 어른으로 '할 일은 하는' 책임을 다하면서도 인생을 즐기고 싶다는 율민이. 나도 어릴 때 이런 장래 희망을 꿈꿀 걸 그랬다.

나는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 왜냐하면 2학년(?) 쯤에 그린*스 후원 광고를 봤다. 그전, 더 어릴 때는 뭔 상황인지도 몰랐는데 그날 어딘가에서 환경에 대해 알게 됐다. 그리고 저녁에 TV를 볼 때 그 광고를 본 것이다. 나는 위기에 처한 북극곰을 보고 충격에 빠졌다. 그리고 생명(특히 동물)을 파괴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생명을 소중히 여겨 인간 중심이 아닌 모든 생명체가 지구의 중심이 되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시현)

*시현이다운 꿈. 동물을 사랑하고, 환경을 걱정하는 마음이 누구보다도 큰 시현이라 이런 글이 나올 거라 예상은 했으나, '인간 중심주의'를 넘어 '생명 중심주의'를 바라는 마음이 들어 있다. 짧지만, 지구 환경을 어떻게 지켜가야 하는지 정곡을 찌르는 글.

나는 시간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시간 약속을 잘 못 지킬 때가 있다. 예를 들어 같이 아침에 학교에 같이 가는 친구들과의 약속, 주말에 친구들과 놀 때의 약속 등 일상생활에서는 많은 약속을 지켜야 한다. 그 약속을 어기면 한 번 두 번은 봐주겠지만 같이 놀 때마다 늦으면 같이 놀기 싫어질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시간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사람이 되려면 준비를 일찍 하고 진짜 중요한 약속이면 전날에 옷을 코디하거나 가방을 미리 싸놓으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시간 약속을 까먹지 않고 늦을 것 같으면 미리 연락을 해 놓으면 좋을 것 같다. 나는 시간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 될 것이다.(서현)

*시간 약속만 잘 지켜도 기본적인 신뢰를 잃지는 않을 거야. 약속을 어기면 한두 번은 봐주겠지만 반복되면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네. 그러고 보니, 서현이는 옷을 고르는 데 시간이 많이 드는 것 같군.

나는 피아노를 잘 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왜냐하면 곧 피아노 콩쿨이 있는데 꼭 합격하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피아노를 잘 치려면 연습을 많이 해야 한다. 그리고 악보를 빨리 봐야 한다. 긴장하지도 않아야 하고, 손이 자주 차가워지면 안 된다. 그래서 손을 따뜻하게 유지해야 한다. 그리고 피아노를 잘 치면 선생님께 두 배로 사랑받을 수 있고 친구들도 나를 존경(?)할 것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친한 언니가 있는데 그 언니가 피아노를 잘 쳐서 같이 치면 너무 차이 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 그것도 하나의 이유이다.(주하)

*피아노를 잘 치고 싶은 마음 안에 교사에게 사랑받고 싶고 친구들에게 인정도 받고 싶은 마음이 들어 있는 주하. 피아니스트가 될 소질이 충분히 보이는 주하의 실력이기에 네 장래 희망을 응원해. 그러나 혹, 만약에 피아노를 치지 못하는 때가 온다고 해도 피아노와 함께한 시간들을 사랑하게 되길 바라.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은 똑똑한 사람이다. 하지만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은 상식의 틀에서 벗어난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내가 이런 사람이 되고 싶은 이유는 기본적인 사고방식은 공부를 많이 하고, 연습을 하면 어느 정도 키울 수 있지만, 창의력, 상상력 등은 기본적인 사고보다 상향시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 내 생각이지만 요즘 사람들은 일론 머스크처럼 혁신적인 사람들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많이 도움은 안 되겠지만, 내가 창의력 상상력이 좋다면 우리나라 기술력에 내가 한 0,001% 정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새로운 방식의 무기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잘 살 수 있는 기술 등을 만들 거다.) 그래서 결론은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은 똑똑한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되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제 생각엔 상상(공상)을 많이 하거나 문학 책 등을 많이 읽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연우)

*연우는 이미 똑똑한 것 같은데 더 똑똑해지고 싶은가 보다. 연우가 똑똑해지기 위해 문학책을 읽어야 할 것 같다고 써서 나는 더 기분이 좋아졌다.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기술자가 탄생할 것 같아서. 그리고 연우의 글을 읽으며, 이 글의 마무리도 생각해 냈다.


지금까지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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