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23일 수요일 / 영춘화가 활짝 피었습니다
한때는 유명한 사람, 아니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연예인 친구가 한 명쯤은 있기를 바랐다. 사오 년 전, 딸내미가 BTS에 푹 빠져 허우적대고 있을 때 가장 부러웠던 사람은 동료 선생님이었는데, 그 이유는 그 '선생님의 시동생이 BTS 멤버 중 한 명과 어릴 적에 같은 댄스학원에 다닌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돈의 팔촌의 친구의 어머니의 아는 이웃쯤 되는 그 길고긴 끄나풀이라도 붙잡고 있다면, 재수좋게 친필 사인 한 장이라도 받을 수 있을지 모르니까.
그런데 간혹 텔레비전을 보거나 포털 뉴스를 보다 보면, '아니, 쟤가? 나 쟤 아는데?' 하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지난 명절 때는 아주 가까운 친척이 모 프로그램에서 자주 얼굴을 비쳐서 깜짝 놀라기도 했고, 우연히 집어든 잡지에서 젊을 적 주일학교 교사 시절, 빨간 뾰족구두 신고 다녔던 항공사 승무원 언니가 '교수수녀님'이 되어 쓴 칼럼을 발견하고는 '이거 실화냐?' 라는 말이 절로 나왔더랬다.
초등학교 6학년까지 코를 찔찔 흘리고 다니던 남자 아이가 동창회에 나와 큰 회사 대표가 된 자신의 명함을 자랑스레 돌리던 것을 보았을 때나, 여고 동창생이었던 친구가 유명한 화가가 되어 꽤 커다란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게 처음 드는 생각은 늘 이런 거였다.
'쟤, 나보다 공부 못했는데.'
그리고, 또 하나.
'몰라보게 예뻐졌네?'
...
그랬다.
성적과 외모, 모든 것이 이 두 가지의 기준에 의해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던 학창시절을 살았다. 그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그런 교육을 받으며 자랐으니, 함께 밥 먹고, 수다떨고, 웃고, 선생님 흉보고 하던 친구들조차도 성적과 외모라는 잣대로만 보게 되었던 거다. 인생을 살면서 성적과 외모라는 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깨닫게 되었지만, 오랫동안 뇌리 속에 잊혀져 있던 사람들을 느닷없이 마주치게 될 때는 영락없이 또 그 잣대로 바라보게 되었던 거다. 그래서 나보다 공부를 못 했던 친구나, 여고시절 별로 예쁘지 않았던 친구가 몰라보게 우아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을 때, 묘한 질투심이 다시 불타올랐던 거다.
그런데, 질투심이 수치심보다는 나았던 것 같다. 내가 알고 있던 사람이 말도 못하게 훌륭한 사람이 되어 칭송을 받는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는 질투심을 느낄지언정 부끄럽지는 않았다. 부러우면 지는 거야,라는 말을 앞세워 솟아오르는 질투심은 감추고 '너를 알고 있음이 자랑스러워.'라고 말할 수 있었다.
지난 대선 이후, '너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었음이 너무 수치스러워. 네가 내가 사는 이 나라를 대표하게 되었다는 것이 죽을 만큼 부끄러워.'라는 수치심 때문에 거의 화병이 날 지경이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런 중차대한 대통령 선거라는 국면에서도 '성적과 외모'라는 요인이 작용했었던 것 같다. 사람 앉는 자리에 구둣발을 올려놓고, 무시와 위협이 그 사람의 인성이자 태도가 되었는데도 '서울 법대'라면 문제가 없었고, 외모를 뜯어고치듯 권력과 재물을 차지하기 위해 모든 걸 조작해 살았어도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 아니었을까. 이쯤 되면 성적과 외모라는 잣대는 그저 지난 시절의 잘못된 가치관이라기보다는, 범죄를 합법화해 줄 수도 있는 무시무시한 권력의 도구가 아닐 수 없다.
딸내미도 두어 달 전, 벽에 도배를 하듯 붙여놓았던 BTS 사진들을 다 떼어냈다. 이제 드디어 탈덕하느냐고 묻는 내게, "탈덕까진 아니지만. 그동안 덕질하느라 여기에 쓴 돈이 아까워서 못 뗐던 거지."라며 웃었다.
딸내미까지 탈덕 수준에 이르고 나니, 정치 뉴스건, 연예 뉴스건, 사회 뉴스 건, 뉴스에 나오는 사람을 알고 있다고 해서 질투가 나거나 부러운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 아니, 제발 이제는 내가 아는 그 누구도 뉴스에 나오는 일은 없으면 좋겠다. 지금 가까이 있는 내 식구들, 내 동료들, 친구들, 친척들은 물론, 아스라히 잊혀져 가는 첫사랑의 이름일지라도 사기범죄자 명단이나 불의의 사고 현장에서 마주치고 싶지는 않은 거다.
아, 아니다. 이 사람을 알고 있어 자랑스러워, 멀리서나마 이 사람을 한 번이라도 만났다는 게 정말 행복해, 이 사람과 가까이 지냈던 사람, 날마다 만나는 사람이 너무 부러워,라고 느끼는 사람이 있기는 하네.
딱 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