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24일 목요일
Episode1.
모의고사를 보는 날이라고 했다.
고등학교 입학하고 한 달만에 보는 첫 시험이다.
중소도시에 살고 있지만 우리 집은 치킨배달도 잘 오려 하지 않는 외진 동네에 있어서, 고등학교 입학 후 등하교 셔틀은 내 몫인데, 아침저녁으로 20분씩 차 안에서 나누는 대화로 아이의 학교 생활은 어림짐작할 수 있다. 시험날 아침이면 긴장할 법도 한데, 딸내미는 다른 날보다 오히려 더 경쾌하다.
"나 오늘 학교 가면 뭐하지? 애들은 시험 공부하고 있을 텐데?"
"너도 하면 되지."
"다 중딩 때 것 나오는데? 나 중딩 책도 없어."
"그래? 그럼 할 수 없지 뭐. 중학교 때 선생님들이라도 떠올리면 학과 내용이 생각나지 않을까?"
"그렇지. 근데 문제는, 선생님 얼굴만 기억나지, 선생님이 가르쳐 준 내용은 생각이 하나도 안 난다니까?"
".... 그럼 선생님하고 텔레파시라도 통해 보든가?"
"맞아. 엄마, 내가 시험 시간에 하는 게 바로 그거야. 그게 찍는 거거든."
키득키득거리면서 받아치는 말을 이기지 못하겠어서 같이 웃어버린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하교 때 다시 만난 딸내미는 여전히 발랄하다.
"엄마, 나 네 과목 다 찍었고, 국어만 좀 풀었는데, 그것도 문제 읽다 보니까 시간이 거의 다 갔더라? 그래서 국어도 남은 건 찍었어."
"아이구, 국어는 좀 좋아하지 않았어? 그런데도 찍었어?"
"내가 국어는 풀려고 했지. 그런데 문제를 읽는데 이런 생각이 들더라? '이게 뭔 개~~소리야?' 하하하"
그러더니, 잠시 후에
"대학에 가도 공부해야 하는 거야?"라고 묻는다.
"그럼, 대학은 공부하려고 가는 거지."
"공부하는 데 가려고 또 공부를 해야 한다는 거, 이상하지 않아?"
"그러네."
"엄마.... 나... 이담에 뭐해서 먹고 살지?"
"...."
"난 내가 그림 잘 그리니까, 내 그림을 십원만 줘도 사겠다는 사람 있으면 그거 팔 거야."
"...."
아이는 저녁 식사 때 '뭔 개~~소리?'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는 국어 시험의 문제를 읽어주었다.
플라톤의 이데아, 현상계가 어쩌구, 그 다음 지문은 이진수가 어쩌구저쩌구.
밥 먹다가 셋이 모두 웃으며, 합창을 했다.
"이게 뭔 개~~소리야?"
한참 웃었지만, 마음은 무겁고 속이 상했다.
'우리 딸내미, 학교 다니느라 정말 고생이 많구나. 그런 문제를 풀어야 한다니, 지금 가야 한다면 엄마는 대학은커녕 중학교 졸업도 못했을 것 같네'
꽃처럼 이쁜 나이에, 뭐하고 먹고 살지를 걱정하게 하는 우리 사회, 정말 괜찮은 걸까?
Episode2.
입대한 지 5개월차. 일병 달 때 휴가를 다녀간 아들내미, 이번 주간에 훈련이라고 했었다.
끝이 났을까 싶어 주말에 톡을 해놓았더니, 수요일 밤 늦게야 답이 왔다.
"훈련은 방금 끝났어요. 그런데 휴대폰 지금 내야 해요."
훈련이 끝났다니 조금 낫겠구나.
다시 답을 보내놓고 기다렸더니, 밤에 답신이 달렸다.
"훈련은 끝났는데 곧바로 전투대기 상태예요. 손목이 아파서 다음주에 외진 나가려 해요."
또다시 가슴이 덜컥.
발가락이 토실토실해서 무좀과 건선을 달고 사는 아이에게 군화를 신기고,
벌레 하나만 봐도 기겁을 하는 아이가 총을 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싫고 아팠다.
여느 엄마들처럼 너가 컸을 때는 군대 안 가도 될 거야, 하면서 아들을 키웠는데, 대한민국의 상황은 바뀌지 않아 귀한 내 새끼는 여지없이 군대로 끌려갔다.
미안하다, 아들아. 엄마는 빽이 없어 너를 군대에 보낼 수밖에 없었구나.
필요에 따라 부동시 판정을 내줄 의사 친구도 없어 너를 군대에 보낼 수밖에 없었구나.
건강하게 태어나 건강하게 자란 아들이 자랑스럽지만,
엄마가 못나서 군대에 가게 된 건 아님을 알지만,
자기는 군대도 안 가고, 아이도 안 키워 봐놓고
선제타격이니 뭐니 하며 전쟁의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건 아니지, 싶어
아직도 속에서 열불이 난다.
대선후유증, 좀 길게 갈 것 같다.
Episode3.
그래도 꽃은 피고 있다.
이름은 매화이나, 봄꽃이 다 떨어지도록 웅크리고만 있는 우리 집 왕매실나무의 꽃도 곧 벙그러지리라.
박노해 시인은 "꽃은 달려가지 않는다"고 했다.
달려가지도 않지만, 목을 쭉 빼고 기다린다고 달려오지도 않을 터.
죽지 않았으면 피어나겠지.
꽃도, 이 땅의 평화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