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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것들이 살고 있다

2022년 3월 27일 일요일 / 봄의 빛깔들

by 글방구리

춘분이 지났으니 밖으로 나와 기지개를 켤 법도 한데, 나는 오히려 두더지마냥 지난 한 주간 내내 집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뒷산 산책도 하지 않고, 아침 운동도 하지 않고, '집을 즐긴다'는 기치 아래 한껏 게으름을 부렸다.

그러는 사이에 봄은 왔더라.


오랜만에 자전거를 끌고 동네 산책을 나왔다. 겨우내 닫혀 있던 주말농장마다 삼삼오오 모여서는 밭을 갈고 있었다. 노지에서 자라는 쪽파, 양파, 마늘 등은 날마다 키자랑을 하는 아이들마냥 몰라보게 자라 있고, 어느 누구보다 빨리 관심을 받으려는 마음 급한 봄꽃들은 이미 자기가 고른 색을 다 골라 입고 나와 앉았다. 페달을 세게 밟는다고 종아리 근육이 힘을 내도 앞에서 불어오는 바람 탓에 자전거 속도는 걸음마 배우는 아이보다 늦은데, 게다가 눈에만 담기 아쉬워 카메라에 담으려 하니 자전거가 거추장스럽다. 속도를 즐기지 못할지언정, 차라리 내려서 찬찬히 볼 거 다 보면서 끌고 가기로.

20220327_143847.jpg [동네 복지관 앞 길거리에 가로수로 심은 화살나무. 벌써 홑잎나물 새 순이 올라오고 있으니, 요 나물맛 아는 복지관 할매들 손길이 바빠지겠구나.]


호미질하는 손길이 지나갈 때면 잘 익은 햇감자 속살처럼 포실포실한 흙들이 새 숨을 쉰다. 흙냄새가 나는 것 같다. 나도 한켠 분양받을 걸 그랬나. '올해는 새로운 일을 하려면 많이 바쁠 거야. 백수 과로사라는 말도 있잖아.'라며 분양문의 전화번호를 지워버린 걸 잠깐 후회했다. 꽃이 피는 것도 부럽고, 수확을 꿈꾸며 고랑마다 씨감자를 놓는 손길도 부럽고, 코로나 바이러스 따위는 이제 겁이 나지 않는 듯 여럿이 함께 모여 밭을 갈고 있는 모습도 부럽다. 그 희망들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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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미사에 갔다. 오늘의 복음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장)다. 눈을 감고 신부님께서 들려주시는 복음을 듣는다. 한편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말씀이 어찌나 드라마틱한지. 아버지가 죽기도 전에 유산을 물려달라는 작은 아들의 요구(패륜), 그 재산을 가지고 떠나 창녀에게 빠져 모두 날리고(19금), 그제야 뉘우치며 집으로 돌아오는데(반전), 그동안 아버지는 문 밖에 나와 아들만을 기다리고(휴먼 다큐), 자기에게는 그렇게 해주지 않았다며 화를 내는 큰 아들(복수)까지, 흥미진진한 요소는 다 갖추고 있는 듯하다. 문득 오래 전, 가슴을 뜨겁게 달궜던 강론 말씀이 그리웠는데, 똑같은 복음 말씀인데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하고, 해석하고, 느끼는 그 신비에 다시 한 번 놀란다.

똑같은 꽃을 사람마다 다르게 보고, 똑같은 말씀을 사람마다 다르게 듣고, 똑같은 하루하루를 사람마다 다르게 사는 것. 그건 꽃이든 말씀이든 시간이든, 다 살아 있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살아 있어서 멈추지 않고 움직이고,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살아 있기에, 살고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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