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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이수정(뽀득여사) / 감정씨, 나한테 감정 있어요?

by 글방구리

한 달에 하루, 진득하게 앉아 글쓰기만 하기에는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4학년 아이들과 지역에 있는 작은 박물관에 가고 있습니다. 제가 사는 곳이 국책연구소들이 많은 지역이라 제법 다양한 박물관들이 주변에 있거든요. 학교를 파하고 출발해서 저녁 먹기 전에는 돌아와야 하는지라 먼데로는 가지 못하지만 친구들과 버스 타고 나가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나들이가 됩니다. 그리고 그 달에 가는 박물관을 주제로 한 달 글쓰기 글감을 정하기도 하지요.


지난달에는 [천연기념물 센터]에 다녀왔어요.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국가유산청에서 관리하는 자연유산 전문 전시기관이라 귀한 볼거리들이 많습니다. 이미 멸종이 된 것들도 있고, 멸종 위기를 맞고 있는 동식물들도 있습니다. 아이들은 맛있게 구워 먹은 제주흑돼지가 천연기념물 자리에 떡하니 올라와 있는 것을 보고는 입이 떡 벌어집니다.


센터에 다녀온 다음 주 글쓰기 시간에 아이들에게 이런 글감을 내주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흔하게 보거나 먹거나 하지만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그게 너희들 손주 세대에서 멸종이 되었다고 생각해 보는 거야. 할아버지, 할머니가 된 너희가 미래의 손주 손녀한테 말해주는 형식으로 써 봐. 대상은 동식물 모두 가능해. 진짜 멸종위기종이 아니어도 되지만, 너희가 좋아하는 것 중의 하나여야 해."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따오기 노래에 등장하는 따오기나 옛이야기의 단골 소재인 황새도 지금은 인위적으로 복원사업을 하는 천연기념물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해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과나 수박 등 먹을거리나, 집에서 키우는 반려동물인 앵무새나 도마뱀을 소재로 열심히 공책을 채워갑니다.


복잡한 감정씨
놓을 수 없는 감정씨
이해가 되었다가 안 되는 감정씨
종잡을 수 없는 감정씨
시작과 끝을 모르겠는 감정씨
그러나
매력적인 감정씨
없으면 안 되는 감정씨
품어 주고 싶은 감정씨(249쪽)

우리의 용감한 뽀득여사 작가님(이수정이라는 본명보다는 뽀득여사라는 필명이 더 익숙해서요)이 이런 감정씨를 링 위로 불러내서 맞짱 뜬 글을 다시 읽으며 박물관에서 보고 온 따오기가 떠올랐어요.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따오기인 듯 숨길 듯이 숨길 듯이 숨겨지지 않는 감정씨.


저는 이성씨보다는 감정씨가 훨씬 더 가까운 사람이에요. 마음도 약하고 의지도 약한 저는 자주 감정씨가 하자는 대로 휘둘리곤 했답니다. 그런데 감정씨가 시키는 대로 끌려갔던 길의 끝은 그다지 좋지 않더라고요. 감정씨는 번번이 가면을 바꿔가면서 제게 나타났는데요, 그에게 홀려 따라간 마지막에는 결국 외롭게 홀로 남겨졌더랬습니다. 가로등도 꺼진 막다른 골목, 박쥐가 매달린 컴컴한 동굴, 역한 화장품 냄새가 진동하는 매매춘 거리 한복판 같은 불쾌한 곳에서요. 그래서 "감정씨, 나한테 감정 있어요?"라고 일갈한 제목만 읽고서도 전 호쾌했더랬지요. 저처럼 감정씨에게 속았다고 느낀 수많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실 뽀득여사님의 완승을 기대하면서요.


아하, 그런데 감정씨의 편지를 읽으니 제가 알고 있던 감정씨와는 매우 다르군요.

끈질긴 뽀득여사님께.
뽀득여사님의 저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익히 아는 바, 거절할 수가 없더군요. 단, 조건이 있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매우 다양한 집합체입니다. 어떤 얼굴, 어떤 목소리, 어떤 태도로 변할지 장담이 안 됩니다. 너그러이 받아 주실 것이라 믿겠습니다.
저 또한 뽀득여사와의 만남을 기대하고 기다리겠습니다.
뽀득여사님이 살짝 부담스러운 감정으로부터.(251쪽)

감정씨는 제게 폭군이며 독재자, 유혹자이며 사탄의 하수인이었는데 감정씨가 말하는 자신의 모습은 매우 여리고 조심스러워 보였어요. 악의라고는 전혀 없어 보였고요!

감정씨는 이렇게도 말합니다. "당신은 나에 대해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난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강력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반대죠.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여러 개체의 집합체예요. 내 안의 개체들은 너무 달라서 하나의 전체로 섞이지 않아요."(253쪽) 아, 그렇다면 저는 그간 도대체 누굴 따라간 걸까요? 저를 꼬드긴 그것들을 왜 감정씨의 본질이라고 착각한 걸까요?


감정씨는 이렇게 혼란스러워하는 제 마음을 읽은 듯합니다.

"사람들은 나를 변덕스럽고 즉흥적이고 비합리적이며 이치로 설명되지 않는 것이라는 수식어를 내 앞에 잘 붙이더군요. 물론 어느 면에서는 인정하는 부분도 있어요. 맞아요. 내 안의 개체들은 불쑥 자리바꿈을 잘하고 고집스럽게 물러나지 않으려는 성향들이 있기는 해요. 각자의 개성이 너무 뚜렷하다고 해야 할까요. 가끔은 내 안의 개체들을 컨트롤 못 하는 비상상황이 발생하기도 해요."(254~255쪽)


따오기 노래가 만들어진 때는 일제강점기였다고 합니다. 실제로 보일 듯하지만 볼 수 없는 안타까운 현실, 잃어버린 나라를 그리워하는 감정 등을 담아 써진 거라고 해요. 그러나 그런 원래 의도와는 별개로,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다는 노랫말에서 저는 숨길 듯이 숨길 듯이 숨겨지지 않는 감정씨를 떠올립니다. 감정씨야말로 숨길 때와 드러낼 때, 보일 때와 보이지 않을 때를 잘 구분해서 만나야 할 대상이라서요. 그러지 않으면 감정씨 자체를 악마화할 수도 있고, 이성씨보다 못난 존재라고 힐난할 수도 있겠어서요.


참, 우리 4학년 아이들은 글을 참 잘 썼더라고요. 자기들이 누렸던 좋은 것들을 손주들 세대와 함께 나누지 못하게 되어 애석하다고들 하네요. 말 나온 김에 작가님께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다음에는 요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콧대가 높아져 건방을 떠는 'AI 씨'와도 담판 한번 지어주시죠? 이러다 우리 아이들 세대에는 감정씨는 물론 이성씨까지죄다 멸종위기종으로 분류될까 봐 걱정스러워져서요.


*대문사진: 네이버 이미지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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