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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은 자기 몫이다

2022년 4월 2일 토요일 / 드라마 [서른, 아홉]을 보고

by 글방구리

[서른, 아홉]이라는 드라마를 보았다. 엊그제부터 한쪽 눈에 다래끼가 나서 가뜩이나 불편한데, 마지막회는 얼마나 울면서 봤는지 양쪽 눈이 다 시큰거린다.

몇 년 전에 일을 잠시 쉬고 있을 때, 드라마 정주행을 자주 했다. 넷플릭스 구독료가 꼬박꼬박 빠지는 것이 아까워서 사람들 입길에 오르내렸던 드라마는 다 찾아봐야지 했다. 그러다 보니 '참 잘 만들었네' '드라마에도 철학이 담겼네' 하는 작품들을 간혹 만났다. [나의 아저씨] [눈이 부시게] [디어 마이 프렌즈] 같은 것들이다. 전문가 평론이 아니고, 순전히 내 개인 취향에 따른 평가이긴 하다. 그런데 그렇게 눈물 찔찔, 콧물 줄줄 흘리면서 날밤을 새가며 봤다고 해도 리뷰를 쓰지는 않았다. 책도 아니고, 드라마로 뭘 리뷰까지.

내가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남편은 가끔 "어떤 내용이야?" 하고 묻는다. 그럴 때면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서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줄거리를 그렇게 쉽게 요약하고 조리있게 이야기할 재주도 없거니와, 드라마에는 줄거리 외의 요소들이 너무 많아서 그걸 말로 전달하기는 쉽지 않아서다. 아마 그래서 드라마 리뷰 같은 건 쓸 생각도 하지 않았나 보다. 그러고 보니 이 글이 첫 리뷰네.


우선 제목이 눈을 끌었다. [서른, 아홉]과 [서른아홉]은 다르다. 서른, 그리고 아홉. 숫자에 담긴 의미가 있을 터. '서른'이라는 나이는 어느 정도 '어른'이 되었다고 느껴지는 나이다. 나 역시 서른살이 되었을 때, 흔들리는 20대로부터 탈출하여 비로소 어른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지 않았던가. 육십이 되어 돌아보면 서른이나 스물이나 그다지 차이가 없지만. '불혹'이라는 마흔을 한 해 앞두었으나, 불혹이 아니니 어쩌면 철이 없을 수도 있고, 철이 없어도 아직은 덜 부끄러운 나이, 뭘 해도 용서가 되는 나이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아홉'이라는 건, 상당히 복잡한 의미다. 예전부터 '아홉'이라는 숫자는 인간으로서 최선을 다한 숫자였다. 정월대보름 때 아홉 가지 나물을 먹는 것도 그렇고, 나무를 아홉번 해오는 것도 그렇다고 했다. 차를 덖을 때 '구증구포'를 하는 것도 횟수로 아홉번 찌고 말린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그만큼 정성을 다했다,라는 뜻이라는 말을 들었다. 국선도 체조를 할 때 용천혈을 치는 동작도 아홉번 한다. 그렇게 아홉이라는 숫자는 충만한 숫자이기는 하나, 동시에 '하나'가 부족한 숫자이기도 하다.

그래서인가, 여기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서른'이라는 숫자처럼 어느 정도 자신의 일을 이룬 멋진 여성들이나, 또 한 번의 '열'을 이루기에는 '하나'가 부족한 부분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이다.


드라마 주인공은 18살 때부터 절친이 된 세 여성이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사람들로 보이지만, 모두가 '하나의 결핍'을 지니고 산다. 차미조(손예진 분)는 성공한 피부과 의사이지만 보육원 출신의 입양아다. 그 친모는 사기전과 7범으로 복역중이다. 정찬영(전미도 분)은 배우의 꿈을 이루지 못한 연기 선생님이다. 사랑하는 남자(김진석)가 다른 여자와 결혼해 사는 것을 지켜보고, 39살에 암으로 요절하게 된다. 장주희(김지현 분)는 엄마 병수발을 드느라 대학에 가지 못하고 백화점 매니저로 산다. 두 친구 사이에서 가끔 소외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 외의 등장인물들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가 다 하나씩 결핍을 갖고 있다. 차미조의 남자 친구로 나오는 김선우(연우진 분)는 가치관이 바닥인 '아버지'라는 존재가 그렇고, 김진석은 사랑 없는 결혼을 유지하지만 그 아들은 자신의 친자가 아니라는 점이 그렇다.

이렇게 모두가 '하나의 결핍'을 가진 존재로 그려지면 드라마 분위기가 어두울 법한데, 세 여자는 이야기를 경쾌하게 이끌어간다. 말기암 선고를 받고 난 뒤에 치료(연명)를 거부하고, '가장 신나는 시한부'가 되겠다고 한 설정도 그런 분위기에 힘을 싣는다. 그리고 드라마는 마지막까지, 정해진 시간을 살아가는 친구가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한 지금을 살아가게 할까,에 초점을 맞춰 전개된다. 부모는 부모의 사랑으로, 친구는 친구의 우정으로. 보내는 사람도, 가야 하는 사람도 같은 사랑과 우정을 충분히 표현한다.


드라마는, 우정과 사랑으로 죽음이라는 어둠의 그림자를 극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던 것 같다. 죽음 자체는 극복할 수 없지만, 우정과 사랑이 죽음의 무게를 조금 덜어준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나는 이렇게 꽉 채운 듯한 우정도, 그 사람만 지닌 '하나의 결핍'은 누구도 대신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을 느낀다. 아무리 우정이, 사랑이 차고넘쳐도 죽음을 대신 해주지 못하듯, 자신의 결핍은 자신이 채워야 인생이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결핍을 결핍인 채 두든, 결핍을 견디지 못해서 굳이 뭔가로 채워 넣으려 하든, 그것은 각자 자신이 선택할 나름이겠지만, 어쨌든 결핍을 마주 대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다. 아홉을 채워도 남아 있는 하나, 그 결핍은 결국 자신의 몫.


누구에게나 하나씩은 주어진 결핍.

그것은 자주 들어온 대로,

바로 나의 '십자가'를 말하는 거라고,

나는 내 언어로 그렇게 알아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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