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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범이

2022년 11월 1일 화 / 원래부터 내 것이었던 건 없거늘

by 글방구리

'부디 오늘은 범이를 만나지 않기를!'

차의 시동을 켤 때면 주문처럼 속으로 외는 말이다. 출근을 하거나 아이 등하교를 할 때, 몇 백 미터 되지 않지만 가야 하는 일방통행로가 있다. 아니, 진입금지가 있는 것이 아니니 일방통행로는 아니고, 차 두 대가 엇갈려 지나가기에 다소 좁은 도로다. 그런데 다행히 도로 양쪽에 주말농장들이 있어서 어쩌다 그 길에서 차들이 마주치게 된다고 해도 조금씩만 후진을 하면 지나갈 수 있다. 서로 조금씩 양보하며 가는 그 길에서 운전자들이 낯을 붉히는 일은 없다. 그런데 가끔 그 짧은 도로에서 '범이'를 만난다면? 그 날은 그야말로 기분 완전 잡치는(똥 밟은) 날이다.


'범이'는 우리 동네에 사는 사람이다. 이름이 '범'이라 그런가 호랑이처럼 눈이 부리부리하고 몸이 크다. 뒤에는 짐을 실을 수 있게 커다란 짐칸이 달린, 세 발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삐그덕삐그덕.

평소에는 멀리서 그가 보여도 옆으로 쌩 지나가면 그만인데, 이 짧은 일방통행로에서 마주치면 피할 데가 없다. 이 길에 익숙한 운전자들은 도로를 보고 후진 거리가 짧은 차가 움직여준다. 그런데 그의 자전거와 마주치면 아무리 짧은 거리여도 그가 먼저 비키는 일은 절대 없다. 아니, 비켜주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는 자기 앞을 막아서는 운전자를 향해 냅다 욕을 한다. 내가 잘못한 거라곤, 내 차가 그의 자전거 앞에 서 있다는 것뿐.

'네~ 네~ 지나가세요.'

그가 지나갈 수 있도록 후진을 해주어도 그는 가던 길을 가지 않고 차 옆으로 와서 소리를 지르며 욕을 한다. 처음에는 너무 무섭고 억울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 그런데 몇 번 같은 일을 당하다 보니 나도 꾀가 생겼다. 요즘에는 멀리에서 그가 오는 게 보이면 다른 길로 돌아가거나, 차를 아무데나 세우고 그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린다. 딸내미 등하교 때 마주치게 되면 딸내미에게도 말한다.

"눈 감고 저 아저씨 보지 마. 눈 마주치면 괜히 욕 먹어."

하지만 그가 차창 옆에 와서 또 괜한 트집을 잡지나 않을까, 지나갈 때까지 가슴이 콩닥거린다.


이 동네에서 어느새 6년 가까이 살았는데, 그의 이름이 '범이'라는 건 두세 달 전에야 알게 됐다. 주말농장 옆에 청포도 농사를 지으시던 할아버지에게 청포도를 몇 박스 사게 되었는데, 그 할아버지는 이 동네에서 산 지 40년이 넘었다고 했다.

"어르신, 왜, 그분 있잖아요. 세발 자전거 타고 다니면서 아무한테나 소리 꽥꽥 지르는~"

"아, 범이?"

"그분 이름이 범이에요? 그런데 그분은 왜 맨날 그렇게 화를 내세요?"

"걔가, 좀 모자라잖아. 동네 사람들한테 하도 욕을 하고 다니면서 **을 해서, 다들 뭐라 해도 안 돼. 나이도 오십이 넘었을 낀데."

성격뿐 아니라 외양으로도 그가 조금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예전부터 어느 동네에서나 한 명쯤 찾아볼 수 있었던 '동네 바보 형아' 같은 이미지랄까. 그런데 그는 착하고 얼띤 이미지가 아니라, 마치 동네 아이들을 잡아갈 것 같은 무서운 이미지다.

궁금했다. 그는 왜 차들이 자기 앞을 막아선다고 생각할까. 그는 왜 늘 화가 나 있을까.


청포도 농사를 짓는 할아버지는 성한 것만 따가라며 땅콩 몇 뿌리를 뽑아주었다. 땅콩을 골라 따는 동안 토박이 할아버지는 수십 년에 걸쳐 이뤄진 우리 동네 개발역사를 한 시간 동안 요약 강의를 해주었다. '요기서 조기까지는 언제, 조기에서 또 조~~오기까지는 언제, 저~~짝에 보이는 아파트는 언제 지어진 것인지', 우리 동네 사람들이 다 좋은 것 같아도 텃세가 꽤 심하다는 등, 평소에는 별로 관심도 없던 이야기들을 쭉 풀어놓으셨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동안, 몇 대의 차량이 농장 앞을 지나쳐갔다. 나처럼 쌩 지나가는 차도 있었으나, 유리창을 내리고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건네는 분들도 있었다.

할아버지는 범이가 왜 화를 내는지 말해주지 않았으나, 나는 땅콩을 따면서 범이가 화를 내는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거긴, 그냥 범이네 동네였고, 자기 길이었던 거네. 그는 원래 자기 땅이었는데, 남들이 와서 쌩쌩 지나다니니 그게 화가 났던 거네.'


그렇다고 우리 동네 범이가 옳다는 건 아니다. 그 길 역시 원래 자기 것은 아니었으니까. 우리 동네도 자기 혼자 사는, 자기 것이 아니니까. 자기가 먼저 사용하고 있었다고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날마다 화를 내는 '화근'이 된 게 아닌가.

원래부터 내 것이었던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돈을 주고 샀다고 해도, 물건마다 이름 석자 적어 붙였다고 해도 그게 진짜 '내 것'인가? 아닐 게다. 진짜 내 거라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하고, 죽어서도 가져갈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낳았다고 해서 자식들이 내 것인가?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다고 해서 내 생명이 내 것인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움직일 수 있다고 해서 내 육신이 내 것인가? 그것도 아닐 게다.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화근'이라고 범이가 말하고 있지 않은가.


어느새 11월이다. '위령의 달'이라 어느때보다 숙연해지는 새 달의 시작. 내 것이 아닌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고, 범이처럼 쓸데없이 화를 내며 내 것이라 주장하지 말자고 다짐한다. 잠시 맡아 사용하는 종에 불과하므로, 원래 주인었던 분을 더 자주 생각하면서 살자고. 하지만 11월에도 그 길에서 범이는 되도록 마주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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