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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꺾마?무처중!

2022년 12월 24일 토 / 달력 만드는 동안 이미 새해는 시작되고

by 글방구리

'어느새 달력을 만드는 계절이 되었다'라는 첫 문장을 쓴 게 11월초. 그리고 그 글을 완성하지 못한 채 한 달 반이 훌쩍 지났다. 일주일만 있으면 2023년이 쓰인 새 달력을 건다. 빠르기도 하여라.

옛날에는 동짓날을 기념하여 임금님이 새 달력을 하사하셨다고 하고, 동지를 작은 설날이라고도 했단다. 밤이 가장 긴, 어둠이 밑바닥을 치고 이제 낮의 기운, 해의 기운이 올라오기 시작하는 날이 동짓날이니, 그 날을 새 날로 삼은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새삼 새롭다.


어린이집 아이들과 하는 활동으로 달력 만들기를 계획했다. 열두 달 달력을 낱낱이 만들자니, 오래 집중하기 어려운 아이들에게 너무 지루한 시간이 될 것 같았다. 일 년 동안 나들이를 다니면서 꽃과 잎을 말려 눌러 놓았고, 치자와 소목으로 염색활동을 할 때 달력 만들 종이에도 예쁜 색을 들여놓았으니, 사실 아이들은 내년 달력을 만들기 위해 일 년 내내 준비한 셈이다.

달력은 계절별로 만들어 보기로 했다. 봄달력, 여름달력, 가을달력, 겨울달력. 그런데 보통 달력들처럼 1월부터 시작하자니, 아무리 봄을 기다린다고 해도 소한 대한 다 들어있는 1월을 봄이라고 할 수는 없겠더라.

"자, 2월에 입춘이 있으니까 2월부터 봄이라고 하자. 2월이 아직 춥기는 해도 그때부터 저 멀리 하늘에서 봄이 오고 있는 거니까."

봄은 4월까지 하기로 했다. 여름은 5월부터 8월까지 넉달. 9월도 요즘은 매우 덥기는 하지만, '가을 추(秋)'가 들어있는 추석이 9월이니 9월은 가을로 쳐준다. 가을은 9월부터 11월까지, 그리고 겨울은 12월. 내년 1월은 쓰고 싶은 사람은 쓰고, 쓰기 싫은 사람은 쓰지 말라고 했다. 아직 한글과 숫자가 익숙하지 않지만, 줄도 쳐 있지 않은 종이에 요일을 맞춰 쓰려 끙끙대는 아이들의 모습이 사랑스럽다.

삐뚤빼뚤, 자기만 알아보는 글씨와 숫자를 쓰고 난 아이들은 하루 하나씩 봄, 여름, 가을, 겨울달력을 만들었다. 봄에는 치잣물 들인 한지에 말린 꽃을 붙이고, 여름에는 한국화 물감을 손도장으로 찍어 잎이 무성한 나무를 만들고, 가을에는 단풍잎과 은행잎으로 장식하고, 겨울에는 캄캄한 밤하늘에 야광별을 붙이고 큐빅 스티커로 반짝반짝 전구를 달았다.

2월은 어린이집을 졸업하고 취학을 준비하는 아이들. 아이들의 2월이야말로 꿈과 설렘으로 가득한 새로운 시작의 달이다. 그렇게 아이들은 초등학교를 향한 첫 발걸음을 내디딜 거다.

새해 달력을 이렇게 정성스레 만들었으니 아이들이 만날 새로운 한 해가 얼마나 하루하루 복될 것인가!

천주교에서는 대림절이 시작되는 날이면 늘 '교회력으로는 새해입니다'라는 말을 빼놓지 않는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림시기부터 '새 시작'으로 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아이를 태중에 배었을 때부터 나이로 쳐주는 것과 비슷하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기다리는 시간이 없는 시간이 아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한 것은, 그렇게 교구마다 성당마다 모두 대림 첫 주일을 교회의 새해라고 선포하면서도, 교회 달력을 대림 첫 주일부터 만들어주는 곳은 없다. 교회 출판사에서 만드는 다이어리도, 교구에서 찍어내는 달력도 모두 1월부터 시작이다. 유일하게 전례력에 맞춰 내는 것은, 그야말로 이름이 <전례력>인 책 하나다.

이름이 전례력인 이 달력만 대림절에 맞춰 나온다.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펴내는 이 작은 책은 책이라고 할 수도 없는 작은 유인물 같은 거라, 일반 서점에서는 구입하기도 어렵다. 이 한 권을 사기 위해 책값의 세 배가 되는 택배비를 물기 아까워 딱히 필요하지 않는 성물을 얹어 사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교회 달력이 대림절에 맞춰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왜 교회는 대림절부터 새해라고 천명하면서 달력은 거기에 맞춰 주지 않는 걸까, 하고 해마다 한숨을 쉰다.


얼마 전 축구 월드컵 경기가 열렸을 때,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말이 유행이었다. 축구선수들이 태극기에 적어 놓은 말이라고. 지는 것과 꺾이는 것은 다른 걸 테다. 승패 여부와 꺾임의 여부는 길이와 무게처럼 재는 단위가 다른 거다. 졌어도 꺾이지 않을 수 있음을 깨달은 어린 선수들에게 응원을 보내고 싶었다.

어린 선수들의 '중꺾마'는 영화 [탄생]을 보면서도 느낄 수 있었다. 청년 김대건은 목이 날아갔지만 꺾이지는 않았다. 그동안 교회에서 너무 김대건만 추켜세우는 것 같아 솔직히 조금은 거부감도 있었다. 이름을 남기지 않은 수많은 무명순교자들의 삶이 어쩌면 사제도, 지도층도 아닌 나같은 일개 평신도한테는 더 가까운 삶일 텐데 하고 느꼈기 때문일게다. 김대건이 짧은 사제 생활을 했지만 이토록 유별나게 기려지는 이유는 그분이 '첫' 사제였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영화 대사에서도 '내가 가게 되면 그게 길이 될 거다'라는 내용이 나왔던 것 같다.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 아무도 해보지 않은 일, 맨 처음, 가장 앞에 갔던 사람. '처음'은 성공 여부와 관련없이 중요하다. 그분이 꺾였으면 다 꺾였을지도, 아니 적어도 더 많은 사람들이 꺾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이제야 한다. 처음은 그렇게 힘든 거구나. 무조건 처음은 중요하구나.


아직도 가끔은 '중꺾마'를 본다.

속으로는 '별다줄!' 하면서, 1월을 기다리는 나도 중얼거려본다.

'중꺾마? 무처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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