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동백서, 어동육서가 제사상 차리는 원칙이라는 건 고등학교 시절 교과서에서 배웠고,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아야 한다는 제기는 만져본 적도 없다.
젊은 시절 회사에 다닐 때 "오늘 우리 집 제사예요."라고 하면 야근도, 회식도 통과되는 것을 보면서, 한 집안에 제사라는 행사는 빠질 수 없는 대단한 의례구나 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두 살 위인 언니가 대학교 졸업하고 얼마 안 되어 결혼하고 나서 집에 왔는데, 평생 해보지 못한 제사 음식을 차리려니 죽을 맛이라며 울먹였다. 나는 그때 사귀던 남자 친구와 헤어져야 하나 고민했다. 식품영양학과를 나온 똑순이 언니가 제사음식 차리는 게 힘들다고 하니, 나처럼 밥 한 번 제대로 해본 적 없는 사람은 시집가면 어쩌라고.
내가 제사를 모르고 살았던 것은 골수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이다. 지금은 설이나 추석 때가 되면 제대 앞에 돌아가신 조상들 위패도 붙이고, 간단히 음식도 올리면서 '합동위령미사'라는 것을 지낸다. 그런데 이런 합동위령미사를 드린 것도 그리 오래된 전통은 아니다. 글쎄, 불과 삼사십 년 전쯤 되었을까? 아니면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부터일까? 추석 때 제대 앞에 상을 차리는 걸로도 설왕설래, 조상들 이름 앞에서 인사하는 걸로도 옥신각신, 이게 맞네 저게 틀리네 말이 많았던 것 같다.
제사 때문에 신해박해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역사 교과서에도 나오는 사실이라, 천주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상식으로 아는 부분이다. 윤지충, 권상연이라는 분이 모친상을 치르고 제사를 지내지 않은 죄. 그게 발단이 되어 결국 천주교 박해로 이어지게 됐다고.
지금 생각해 보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기는 하다. 순교자 신심이라기보다는 배교자 신심에 더 가까운 나는 '제사 지내는 게 뭐라고 그걸 안 지내서 순교를 당하나?' 싶기도 하고, '제사 안 지내는 게 뭐라고 그걸 안 지냈다고 사람을 죽이나?' 싶기도 하다. (가만. 돌아가신 윤지충, 권상연의 모친은 제사를 안 받아서 서운했을까? 그깟 제사가 뭐라고 이런 사달을 냈느냐고 혼내진 않았을까? 아니면, 이 세상 모든 엄마가 그렇듯, 이 또한 먼저 죽은 내 탓이지, 자식들이 뭔 잘못인가, 하면서 스스로 자책했을까?)
사실 이건 그냥 내가 그려보는 소설의 한 장면일 뿐이다. 조선의 박해는 이렇게 한 개인의 잘잘못으로 인해 일어났다기보다는 당시 세계정세와 권력다툼으로 인해 일어난 것이기에, 제사를 지내는 게 죄니, 안 지내는 게 벌 받을 일이니 하는 논쟁은 사실 부질없어 보인다.
박해를 받던 수백 년 전에도,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는 지금도, 교회는 주일마다 꼬박꼬박 '제사'를 지내고 있기 때문이다! 주일에 지내는 미사, 그것이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제물로 내놓는 제사 아니던가. 한 주간도 빠짐없이 지내고, 심지어 한 주간에도 여러 차례 반복해서 지내면서,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제사 운운한다는 것이 뭔 의미가 있나.
어릴 적에는 살아 있을 때 알던 사람이 죽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아는 죽은 사람'은 손가락으로 헤아려 볼 정도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이 내가 처음으로 경험한 지인의 죽음이다. 그때는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무서웠다. 돌아가신 분이 귀신이라도 되어 나타날까 싶었는지, 노란 근조 등(謹弔燈)이 걸린 큰 집 앞을 지나치는 것도 겁이 났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도 초상집 구경을 가긴 했나 보다. 훨씬 더 어렸을 때, 나는 오빠, 언니랑 같이 구성지게 성인호칭기도를 부르며 '연도 놀이'를 했기 때문이다. 오빠가 신부님이 되고 언니와 나는 신자가 되는 '미사놀이'야 심심할 때마다 했지만, 연도놀이는 어쩌다 한 번씩 했다. 아마도 초상집에 다녀온 다음날에 했던 놀이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나이를 먹을수록 연도놀이가 아니라 연도를 바쳐야 하는 일이 많아졌다. 아는 사람들이 종종 죽었다. 중학교 1학년 같은 반이던 친구가 만원 버스에서 떨어져 죽었고, 고등학교 2학년 때는 한 친구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담임선생님과 함께 그 친구네 집을 찾아갔을 때, 넋 빠진 엄마가 그 아이의 교복을 이불 위에 얌전히 펴놓은 것을 보고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기보다는, 왠지 그 친구의 혼령이 보이지 않게 교복 속에 들어 있을 것 같아 얼른 그 자리를 도망치고 싶었다. 어릴 때 알던 사람들이 이렇게 '사고'로 죽었던 그때까지만 해도 죽음은 내게 멀리 있었다.
그런데 그 후 세월이 흐르면서 아는 사람들이 자꾸 병을 앓다가 죽는다. 삼십 대에 가기도 하고, 사십 대에 가기도, 오십 대에 가기도 한다. 지금까지는 그 아는 사람의 범주가 내 부모님들, 친구의 부모님들, 부모님의 친구분들, 선생님들처럼 나보다 나이가 많은 분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세월이 조금 더 가면 내 친구들, 내 동기들 순서가 될 게다. 그즈음, 어딘가에서 내 순서가 되기를! 나보다 나이가 적거나 아주 어린 사람들, 아직 번호표 타려면 멀리 있어야 할 젊은 사람들이 먼저 가는 것을 생각하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많이 힘들다. 나이가 어리고 젊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사고를 당하는 일은 그 사람을 알고 모르고를 떠나서 가슴이 찢어지는 일이다. 그래서 아직도 세월호가 아프고, 이태원이 아프다.
세월호와 이태원만큼은 아닐지라도, 사제와 수도자의 죽음도 그에 못지않게 안타깝다.
수녀님들이 돌아가신 부고를 보면 그분이 수녀원에 입회한 시기가 같이 나온다. 생년월일, 입회일, 수도연령. 지금은 서른이 훌쩍 넘긴 나이에 하는 만혼(晩婚)이 대세지만-그나마 결혼을 하지 않는 비혼도 많고-, 예전에는 이십 대 초반이면 너나없이 결혼을 했다. 결혼적령기가 수도원 입회적령기라고 했는데, 그래선지 그분들의 입회 때 나이는 대체로 십 대 후반, 이십 대 초반이다. 아아, 십 대 후반, 그 어린 나이에 무얼 안다고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하느님께 바친다고 수도원에 들어갔을까. 그러고 나서 수십 년 동안 주방에서, 제의실에서, 세탁실에서 보이지 않는 희생을 바치면서도 마알갛게, 투명하게 살았던 분들. 그러한 분들의 죽음은 아프지만 아름답다.
인간적인 약점이 아무리 많아도, 사제는 하느님이 직접 축성하신 사람들이다. 하느님의 복을 빌어주는 제사장들이라, 그들이 짊어진 삶의 무게는 그들 각자가 인간적으로 살아가는 모습과는 다른 단위로 재야 한다. 하느님 앞에 섰을 때, 아마 하느님도 역시 다른 잣대로 그들을 심판하실 거라 생각된다. 맡겨놓은 달란트가 다르니 기대하시는 것도 다르실 터. 그건 그들과 하느님의 관계지,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판단할 바가 아니다. 어쨌든, 예수님의 죽음을 기리는 제사를 드려야 하는 분들이 그 일을 충분히 다 하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는 마음은 참 아프고 안타깝다.
다음 주면 사순시기가 시작된다. 한 해 내내 일주일마다 거르지 않고 제사를 지내며 죽음을 기억하는 것도 모자라, 사십일 동안은 대놓고 아파하란다. 구세주로 오신 분이 죽기까지 겪은 고통과 괴로움을 하나도 잊지 말고 샅샅이 찾아내서 곱씹고 뼈와 살에 새기란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 사람을 사십일 내내 마음에 모시고 살란다. 교회라는 곳, 참 독하고 모진 집단이다. 그런데 교회에 다니는 이 사람들은 또 뭐냐. 이 독하고 모진 일을 해마다 거르지 않고, 자진해서, 기꺼이 해낸다.
아마도 죽은 구세주가 다시 살아났듯이, 내가 아는 죽은 사람들도 모두 다시 살아날 거라고, 나도 어찌어찌 죽는다 해도 다시 살아날 거라고 믿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지 않고는 세상 어리석어 보이는 이 시간을 '은총의 시간'이라 부를 리가 없다. 사순시기가 구세주와 피조물이 '찐친'이 되는 시기임을 이미 잘 알고 있는 거다.
나는 지난 주일에 예수님의 제사를 지내고 왔다.
그런데 나는 벌써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나 보다.
사순시기를 기다리는데 왠지 가슴이 두근거리며 설렌다. 내가 미쳤나 보다.
죽음과 삶을 모두 경험한 채, 지금 여기 살아 있는 분은 이 양반 하나다. 그래서 난 이분을 믿고 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