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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 나의 우상은

2023년 4월 2일 일 / 아무 데나 잘못 꽂으면 네 삶도 망할 것이니

by 글방구리

며칠 전 이웃집 라미엄마한테 카톡이 왔다.

라미엄마는 얼마나 발이 넓은지 통반장 다 할 사람(진짜 통장이기도 하다)이라, 우리 동네에서 일어나는 어지간한 소식은 라미엄마를 통해 듣는다. 누가 집을 내놓았는지, 요즘 집값 시세가 어떤지 하는 부동산 정보부터, 어느 학원이 핫한지, 누가 우리 딸내미(그 집 딸내미가 아니고)랑 같은 학교에 다니는지 하는 교육 관련 정보까지, 라미엄마를 통하면 포털 검색하는 것보다 더 맞춤형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이번 톡에는 사진 파일이 하나 첨부되어 있다.

"구청에서 발표한 사업 하나 공유해요. 관심 있으시면 신청하세요."

주정차 금지구역에 주차를 하면 경고 문자를 보내주는 파킹벨 서비스도 라미엄마가 알려줬고, 우리 동네에 요즘 암행 순찰차량이 자주 돌아다니므로 과속에 주의하라는 것도 라미엄마를 통한 고급정보였다. 이번에는 가정용 음식물쓰레기 감량처리기를 구입하면 구입 금액의 70%를 지원해 준다는 내용이었다. 선착순은 아니지만 사업비가 정해져 있으니 기한 내에 얼른 신청을 해야 하고, 지원을 받아 사게 되면 최소 2년은 반드시 사용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다고 했다.

라미엄마가 글을 올리고 나서, 부르르부르르, 다른 이웃집 엄마들의 글이 계속 올라온다. 이미 감량처리기를 사용하고 있던 산이엄마는 처리기를 살 때 주의해야 할 점을 알려준다. 용량이 적더라, 뒤처리가 만만치 않더라, 버릴 때마다 통을 닦아야 하는 게 오히려 일이더라, 하는 얘기였다. 그 글의 답글로는, 요즘엔 자동세척기능이 있다더라, 용량도 커졌다더라, 하는 내용이 주르륵 달렸다.

'나도 한번 신청해 봐?' 마음에서 저울질이 시작되었다.


아파트에 살 때는 그냥 모아지는 대로 가지고 내려가서 커다란 쓰레기통에 쏟아붓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주택에 살기 시작하면서는 음식물 쓰레기를 각자 집 앞에 내놓아야 하는데, 어떤 때는 몇 날 며칠 모아야 한 통이 차기 때문에 스티커 하나 붙일 만큼 양을 모으기는 번거로운 면이 없지 않았다. 이사 오고 처음으로 맞은 여름, 베란다에 쓰레기통을 두고 쓰레기를 모았는데, 뚜껑을 열어보고는 꿈틀거리는 구더기에 어찌나 놀랐는지 그 장면을 떠올리면 아직도 팔에 소름이 돋는다.

처리기 속에서 깔끔하게 처리된 음식물 쓰레기를 우아하게 갖다 내놓은 장면을 상상한다.

'그래, 구더기 따위는 생길 수가 없겠지!'

마음이 기운다. 지원 대상이 된다는 제품을 검색한다. 그런데 제품의 크기가 만만치 않다.

'어디에 두지?'

냉장고와 전자레인지는 가구처럼 자리 잡고 있고 전기밥통, 전기 물주전자는 상시로 나와 있다. 그뿐인가, 수납장 안에는 생선을 구울 때 쓰는 오븐, 주스를 만들 때 쓰는 믹서기, 빵을 구울 때 쓰는 토스터, 꽃차를 만든다고 산 미니건조기가 들어 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지름신이 내려서 사 버린 와플기계까지 크고 작은 가전제품들이 가득 차 있다. 모두가 전기를 꽂아 쓰거나 충전을 해야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미 콘센트는 만원이다. 더 꽂으려면 연장선을 이용해야 할 판이다. 신청하는 쪽으로 기울었던 마음에 제동이 걸린다.

'살림살이 줄여가자고 하면서 또 새로운 물건을 들여놓는 게 맞는 거야?'


이건 부엌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방이든, 거실이든 전기를 사용해야 하는 물건들이 집 안팎에 차고 넘친다.

형광등이 방을 밝혀주고 있고, 벽마다 설치된 콘센트에는 휴대폰 충전기와 이 글을 쓰고 있는 노트북, 스탠드, 무선 이어폰을 사용할 수 있는 충전기가 꽂혀 있다. 취미 삼아 하는 재봉틀도 전기를 꽂아 사용하는 것이고, 재봉질을 하다가 아픈 어깨를 마사지해 주는 기계도 코드를 꽂아야 작동한다. 그뿐이랴. 아무리 태양열 에너지를 사용한다고 해도 냉난방은 전기의 도움 없이 작동하지 않고, 디젤 차량을 폐차하면서 구입한 자동차도 전기차다. 살아가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물과 공기라면, 전기가 그다음 순위로 등극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전기에 의존하는 건 그저 생활의 편의성 때문만은 아니다. 전기를 사용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불안해진다. 여행을 갈 때도 그곳에서 전기를 사용할 수 있는지 가장 먼저 확인하는 습관이 들었다.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충전할 전기충전소가 있는지, 묵을 곳에서 휴대폰 충전을 할 수 있는지를 확인한다.

이미 오장육부(五臟六腑)를 넘어 오장칠부(五臟七腑)가 되어 버린 휴대폰은 100% 충전되었다는 메시지로도 안심하지 못하고, 충전기나 보조배터리까지 가지고 있어야 비로소 마음이 놓인다. 의존을 넘어 중독에 가깝다. 아마 구미호가 소복 입고 앉아 있는 심심산골의 초가집이라고 해도 전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리 무서워하지 않으리라.


성경에서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했다. 이제는 하느님과 전기를 함께 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 보아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전기가 있으면 뭐든지 다할 수 있는 세상이라고 은연중에 믿게 된 건 아닌지를. 코드를 잘못 꽂으면 아무리 좋은 가전제품이라도 고장 나 버린다. 나는 나를 내적으로 충전시켜 주는 코드를 하느님께 제대로 꽂고 사는 것일까. 아니면, 내게 힘을 줄 거라고 생각하면서, 어떤 때는 돈에 꽂았다가, 어떤 때는 새 물건에 꽂았다가, 어떤 때는 맛있는 음식에 꽂았다가 하는 것은 아닐까.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아이들과 지낼 글쓰기 방을 얻으며 있었던 일이다. '빨랫대가 하나 있으면 좋겠는데.'라고 생각하며 걸었더니 누가 내놓은 멀쩡한 빨랫대가 눈에 띄었다. '1인용 책상 하나가 더 필요한데.'라고 생각하며 걸었더니 재활용 수거함에 깨끗한 책상이 있었다. 내게 어떤 물건이 간절히 필요하면, 내가 굳이 그 물건을 사러 가지 않아도 그 물건이 눈에 보였다. 마치 그 물건이 내게 걸어서 온 것처럼.

누군가에게는 쓰레기였으나 나한테는 반갑고 요긴한 물건이었다. 쓸모가 있는 물건이냐, 내다 버려야 하는 쓰레기냐는 종이 한 장 차이다. 냉장고 안에 있으면 먹을 음식이고, 쓰레기통으로 쏟아버리면 그 순간부터 음식물 쓰레기가 되는 것이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다지 열심한 신자는 아니지만 우리 집 식구들이 공통적으로 잘 따르는 교황님의 권고가 하나 있으니, 그것은 음식물 쓰레기를 남기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주문할 때부터 양 조절을 잘해야 한다. 어쨌든 우리에게 주어진 반찬을 되도록 싹싹 긁어먹은 뒤(장 종류나 짠지처럼 너무 짠 음식은 어쩔 수 없이 남기기도 한다.), 물컵은 물컵대로, 수저는 수저대로, 그릇은 그릇대로 잘 정리해 놓고 나온다.

"미션 클리어!"

깨끗이 다 먹고 일어나면 우리도 기분이 좋지만, 음식을 준비해 주신 분들도 고마워하신다.

오히려 음식물 쓰레기는 집에서 더 많이 발생한다. 나름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식구들이 다 먹어주면 기분이 참 좋다. 그러나 맛없게 만들면 이후 내가 혼자 책임져야 하는 몫이 커진다. 맛있게 만들려고 하는 건 식구들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이렇게 노력한다고는 해도, 식재료를 사다 놓고 미처 조리를 하지 못해 버릴 때가 많다. 파는 분들의 꾐에 넘어가 하나 살 것을 두 개 샀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도 있고, 너무 많은 양을 받아서 썩혀 버린 적도 많다. 썩기 전에 나눴으면 되었을 것을. 그래서 음식물 쓰레기에 대한 성찰은 고해성사를 하기 전에 단골로 올라오는 항목이기도 하다.

'그래, 음식물 쓰레기를 더 줄이도록 노력해야지, 쓰레기 처리까지도 전기의 힘을 빌릴 일인가. 쓰레기를 위한 쓰레기가 될 수도 있지.'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저울질은 끝이 났다.


"저희 집은 신청 안 할래요. 좋은 정보는 감사해요." 글을 올리고 단톡방을 닫았다. 모처럼 홀가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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