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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남편일기

혼인신고와 글쓰기

남편이라는 정체성 지키기

by 사이의 글

혼인신고를 하러 구청에 갔던 날이었다. 창구 앞에 앉은 아내와 나는 기분이 이상하다는 말을 계속해서 주고받았다. 법적으로 부부가 되는 순간의 설렘, 번호표와 띵동 울리는 벨소리, 혼인신고 업무를 착착 처리하는 담당 공무원, 그리고 바로 옆 창구에서 이혼신고를 하는 남녀. 구청 민원실의 풍경이 만든 이질감에 우리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잠시 후 공무원의 안내와 함께 혼인신고가 마무리되었다. 이 순간 이후로 내가 누구인지 보여주는 공문서에는 누구의 남편이라는 기록이 추가되었다.


내가 누구인지 궁금하면 공문서를 모아 보면 되겠다.


나는 구청을 나서며 갑자기 스친 생각을 아내에게 말했다. 출생신고부터 언젠가 다른 사람이 대신해줄 사망신고까지. 그 사이에 있을 무수한 흔적들이 곧 나의 정체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 아내는 그래서 결혼정보회사가 이런저런 서류를 다 떼어봐 주는 것 아니겠냐고 거들었다. 전과는 없는지, 결혼 사실을 감춘 건 아닌지, 학력과 직업은 사실인지, 궁금하지만 직접 요구하기 어려운 부분을 결혼정보회사가 대신해준다는 말이었다. 나는 우리도 떼어 봤어야 했는데, 하고 농담을 하려다가 삼켰다. 이제 진짜 유부녀가 되었다는 사실에 아내는 여러 감정이 스치는 듯한 표정이었기 때문이었다.


복잡해 보이는 아내의 얼굴을 보며 혼자 상상해보았다. 만약 전쟁이라도 나서 공적인 기록이 모두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수많은 우리 조상님처럼 아내와 생이별을 한다면, 그녀의 남편이라는 나의 정체성은 어떻게 지켜야 하는 것일까.



출처 : 유튜브 채널 KOREAN DIASPORA KBS

영상 링크 : 65년만의 부부상봉 그 후



실제로 신혼에 발발한 전쟁에 생이별한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를 이산가족 상봉 뉴스에서 본 적이 있다. 놀라운 건 할머니의 기억이었다. 한국에 계신 할머니는 찰나같이 지나간 신혼의 장면들을 아직도 생생하게 묘사해내고 계셨다. 평생 동안 수 만 번 되돌려본 이야기이지 않았을까. 할머니는 생사를 알 수도 없는 남편의 아내라는 정체성을 스스로 써내려 온 이야기로 지켜냈으리라.


프랑스 철학자 폴 리쾨르는 그의 저서 <시간과 이야기>에서 우리가 두 가지 방법으로 정체성을 구분한다고 했다. 하나는 자신이 누구인지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정보로 파악하는 정체성이다. 공문서에 기록될 내용 같은 것인데, 결코 변하지 않기 때문에 동일 정체성이라고 부른다. 다른 하나는 내가 누구인지 스스로 설명하는 나의 이야기다. 자기 정체성이라고도 하고, 서사적 정체성이라고도 한다. 10년 전의 내가 지금의 나와 같은 사람이려면 이 서사적 정체성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내가 써 내려간 이야기로 끊임없이 변하는 나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다.






부부에게는 혼인관계 증명서로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강의실에 들어오던 신입생 무리.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던 그녀. 말을 걸어보려고 쭈뼛거리며 다가갔던 나. 갈 곳은 없고 헤어지긴 싫었던 우리, 그래서 한 겨울에 벌벌 떨며 집 앞 놀이터를 떠나지 못했던 시절. 훗날 그 놀이터에서 들었던 이별통보. 얼마 지나지 않아 재회를 한 곳도 그 놀이터였다. 다시 시간이 흘러 풋풋했던 두 대학생은 처음 만난 그때로부터 10년 만에 결혼을 했다. 기쁨과 슬픔의 시간을 모두 함께 보내며 서로의 성장을 충분히 지켜본 후였다.


혼인신고를 했던 날. 진짜 남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서류에 기록이 달라졌을 뿐 그저 남자 친구의 연장선이라고 생각되기는 싫었다. 오랜 연인에서 남편으로 변한 나의 정체성을 잘 지켜내고 싶은 마음. 오래된 기억들을 재해석하면서 서류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우리 부부의 이야기를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아내와의 이야기를 글로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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