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남편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이의 글 Feb 25. 2022

아내는 쿠키를 굽고 묻는다. 어때?

아내의 세계에 다가가는 남편

뭐가 달라졌는지 맞춰봐.


어려운 질문이다. 차라리 미용실을 다녀왔거나 화장품을 바꿨으면 맞추기 쉬웠을 텐데. 파티셰인 아내가 건넨 문제는 쿠키의 맛이었다. 지난번에 만든 쿠키와 비교해서 무엇이 달라졌는지 맛을 보고 피드백을 달라는 것이었다. 평소보다 천천히 쿠키를 입에서 녹여가며 먹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감상을 전했다. 지난번 쿠키보다 설탕이 덜 들어간 것 같고, 식감은 좀 더 퍼석하다고. 아내는 나의 말에 올라간 입꼬리로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지난번에 먹은 쿠키야. 이런. 당했다.



아내가 구운 쿠키



어느 날 디저트 공부를 하던 아내가 내게 사진 한 장을 메시지로 보냈다. 사진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인류의 20% 미맹이다." 오빠도 미맹인가 봐. 그는 메시지 한 통을 더 보내며 내게 미맹 진단을 내렸다. 미맹. 맛을 지각하는 미뢰의 수가 평균에 못 미치는 사람. 뭐. 인류의 20%나 된다니 그다지 슬프진 않았다.


사실 아내의 판단에는 근거가 있다. 평소 나는 상한 것을 잘 구분하지 못하고 먹는 경우가 자주 있었으니까. 언젠가 남은 찌개를 내가 먼저 떠먹곤 맛있다고 말했을 때, 뒤이어 수저를 든 아내는 찌개를 뱉고 말았다. 그리고 내게 안타까운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맛이 이렇게 시큼한데 어떻게 모를 수 있느냐고. 그 말에 나는 그래서 배탈이 자주 난다고 했다.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있음을 기적으로 느낄 만큼 자주 배앓이를 겪었다. 선사시대에 태어났다면 먹지 말아야 할 독버섯과 복어 따위를 먹고 진작에 사라졌을 유전자였으리라. 유발 하라리는 책 <사피엔스>에서 농업과 산업이 발달하자 별 볼 일 없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도 살아남을 수 있는 '바보들을 위한 생태적 지위'가 새롭게 생겨났다고 했다.



내가 그 바보 중 하나였다.



맛 좀 못 본다고 바보라니. 조금 과한 표현 같지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미각이 둔한 사람은 맛을 기억하는 능력도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 맛이 그 맛 같으니 기억하기가 어려운 건 당연했다. 문제는 잊어선 안 되는 맛과 음식까지도 머릿속에서 깔끔하게 지운다는 것. 한 번은 아내가 기념일에 해준 음식을 너무 맛있게 먹으면서 이게 뭐냐고 해맑게 물었다. 아내는 표정이 굳었고 나는 실수를 직감했다.



내가 이거 오빠한테 세 번은 해줬는데. 이게 뭐냐고?



아내는 체념한 듯한 목소리로 우린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고 했다. 오랫동안 수많은 음식을 함께 먹었지만 같은 음식을 먹은 것은 아니라고. 맞는 말이다. 입 헹굴 물을 준비하고 코를 막아야만 홍삼을 마실 수 있는 아내의 예민한 세계를 나는 절대 알 수 없다. 홍삼을 입에 머금고 있어도 아무렇지 않은 뭉툭한 나의 세계에 아내 역시 결코 닿을 수 없다.


우리는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함께 있지만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일찍 인정했다면 편했을까. 한 때는 각자 자신의 관심사를 상대방도 좋아해 주길 바랐다. 아내는 내가 베이킹과 요리에 관심을 가지길 바랐고, 철학 독서모임을 운영하던 나는 아내가 철학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길 바랐다. 잘 될 리가 없었다. 미맹이며 손재주도 없는 내가 베이킹에 흥미를 느끼기란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아내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둘 다 서운함이 쌓였다.


언제부턴가 서로의 세계에 도달할 수 없음을 깔끔히 인정했다. 아내는 업계 동료와 베이킹 고민을 나누었고, 나는 철학 독서모임을 운영하며 사람들과 철학 이야기를 나누었다. 각자의 세계를 피상적으로만 공유하고 깊은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 해결하기로 한 것. 그러자 모든 게 평화로웠다.


아내의 일이 바빠지기 전까지는.





  

한 업체와 계약을 하고 아내는 새로운 쿠키 레시피를 20여 개나 만들어야 했다. 새벽에 출근한 그를 밤 11시에 데리러 가야 하는 날이 늘자 내 마음도 무거웠다. 마감일에 좋은 성과를 보여줘야 하는 부담감. 오롯이 혼자 짐을 짊어지는 아내에게 이렇다 할 도움이 되지 못하는 현실이 내게 무기력감을 느끼게 했다.


평소 베이킹에 관심을 가졌더라면 어땠을까. 이럴 때 고민을 들어줄 수라도 있었을 텐데. 타고난 감각은 정말 어쩔 수 없지만, 혹시 베이킹 지식을 쌓으면 맛을 보는 감각도 조금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관심으로 우리의 세계를 좁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아내에게 쿠키 맛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가 해준 쿠키 이야기를 다 이해할 순 없어도 들은 건 일단 일기에 적었다. 예를 들면, 설탕이 많이 들어간 쿠키는 식감이 꾸덕하고 촉촉하다. 반대로 설탕이 적게 들어가면 퍼석한 식감이 된다.






어느 날 아내가 말없이 쿠키를 한 조각 잘라서 내 입에 넣어줬다. 그리고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묻는다.


어때?


나는 지난번 쿠키보다 설탕이 덜 들어간 것 같고, 식감은 좀 더 퍼석하다고 지식을 뽐냈다. 아내는 나의 말에 올라간 입꼬리로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지난번에 먹은 쿠키야. 이런. 당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혼인신고와 글쓰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