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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남편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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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의 글 Dec 02. 2023

한쪽 어깨가 비에 젖어도 좋아.

낭만을 재현한다는 것.

빗소리가 들렸다. 아내에게 어디쯤 오는지 확인했다. 곧 도착해. 답을 듣자마자 서둘러 집 근처 지하철역으로 마중 나갈 준비를 했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우산 두 개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잠시 멈칫했다.


하나만 가져갈까? 


우산을 보며 아내가 아직 내게 존댓말을 하던 오래전 어느 날을 떠올렸다. 그날도 하늘이 종일 흐린 날이었다. 사귀기 전이었는데 왜 단 둘이 청계천을 걸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광화문 교보문고도 들렸다. 아마 책이 어쩌고 하면서 보자는 핑계를 댔겠지. 솔직히 지금 책이 다 무슨 의미인가. 그냥 청계천 길의 폭이나 좀 더 좁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란히 걸으며 때때로 어깨가 스치고 손등이 닿았다. 마주 오는 사람을 피하려다 서로 밀착하기도 했다. 의식하지 않으려 했지만 붉어진 얼굴색을 감추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흐리던 날씨는 결국 비를 불렀고, 우리는 각자 챙겨 온 우산으로 머리 위를 덮었다. 두 개의 우산이 만든 거리만큼 떨어져서 걸어야 했다. 어렵게 단 둘이 학교 밖에서 만났는데 이건 아니지 않나. 내가 자꾸 가까이 다가간 탓에 아내의 우산 끝이 내 얼굴을 때렸다. 약간의 키 차이 때문이었다. 아악. 눈! 사실 우산 살이 눈에 닿은 건 아닌데, 살짝 스친 걸 가지고 나는 엄살을 부렸다. 그리고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자꾸 눈을 찌르니까 우산 하나로 같이 쓰자.


아내는 웃으며 그러자고 했다. 


 




자동 센서가 불을 꺼버린 현관에 서서 두 개의 우산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턴가 아내와 우산을 따로 쓰는 게 당연해졌다는 생각이 스쳤다. 우산은 원래 따로 쓰는 것 아닌가. 두 개가 있는데 굳이 하나만 쓸 이유는 없잖아. 걷기도 불편하고 비도 다 맞으니까. 하지만 나는 우산 하나를 내려놓았다. 작은 우산 하나로 비를 피한 덕에 나의 한쪽 어깨를 비로 다 적셨던 그 시절을 오랜만에 재현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재현에는 소망이 담겨 있다이것은 인간의 아주 오랜 본성이라 할 수 있는데, 구석기시대 사람도 동굴 벽에 자신들이 본 것을 재현하듯 생생하게 그림을 그렸다. 이전에 사냥한 들소나 순록을 그려놓고 그날의 영광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원한 것이다. 그림뿐만 아니라 춤, 노래 그리고 연극의 기원에도 재현을 바라는 소망이 담겨 있다. 마치 우리가 지나간 그 시절의 마음이 다시 돌아오기를 소망하는 것처럼.


지하철역 앞에서 만난 아내는 왜 자기 우산은 없느냐며, 정신을 어디다 놓고 사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재밌잖아. 옛날 생각도 나고. 내 말에 아내는 할 말이 없다는 듯 피식 웃고 말았다. 예상대로 우산을 펴고 딱 붙어 걸어야 했다. 내 체격이 과거보다 불어난 탓일까. 큰 우산인데도 내 한쪽 어깨가 축축해졌다. 뭐 어떤가. 낭만은 이런 불편함에 있다. 비를 덜 맞는 것보다 당신과 붙어 가는 게 더 좋다는 비합리적인 마음. 그게 전부였던 시절도 있었다는 것을 좁은 우산 아래에서 떠올렸다.


가장 낭만적이었던 시절의 재현에는 오래된 부부를 다시 붙여주는 중력 같은 힘이 있을지 모른다. 다 필요 없고 그냥 같이 있자던 그때의 감각, 같이 있을 수만 있다면 다른 불편은 모두 감수할 수 있었던 그때의 감정이 우리를 다시 가깝게 끌어당겨줄 테니까. 다시 그 시절을 느끼고 싶다는 마음이 담긴 재현은 정말로 현실을 바꿀지도 모른다.


우산 아래에서는 자연스레 옛날 청계천 이야기가 나왔다.  


맞아. 오빠 그때 진짜 속이 빤히 보였는데!

그렇지. 내가 그땐 개수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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