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지만 다른 세계를 살고 있다1.
책장에 책을 어떻게 꽂아야 할까?
결혼의 위대함은 이런 질문 속에 있다. 혼자 살 때는 너무 당연해서 질문거리가 될 거라고 상상조차 못한 무언가를 고민하게 만드는 힘. 그동안 잘 작동해온 내 삶의 방식을 낯설게 만들며 나의 경계를 확인시키고, 틀 밖의 세상도 있으니 나와보라고 요청하는 관계. 그것이 결혼의 진짜 얼굴이었다.
신혼집 가장 작은 방을 책방으로 쓰기로 했다. (서재라고 부르기엔 너무 앙증맞게 작은 방이다.) 하얗게 도배한 공간에 맞춰서 하얀 책장을 가져다 놓고, 가져온 책을 빠듯하게 모두 꽂았다. 좁은 공간이라 책으로 더 가득찬 기분이었다. 좋아하는 책으로 꽉 찬 책장에 뿌듯함을 느끼며, 내 취미가 독서인지 장서(藏書)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취미가 독서라면, 특히 전자책보단 종이책이 편하다면, 게다가 지저분하게 밑줄까지 그으면서 읽는 것이 좋다면, 독서는 곧 부동산의 문제가 된다. 한두 권씩 사는 재미에 빠지는 순간, 방 하나 가득 채우는 건 금방이기 때문이다. 감당이 어려워 언제부턴가 사고 싶은 책 앞에서 반드시 소장해야만 하는 지 몇 번씩 되물었다. 소장해야 한다는 답이 바로 나오지 않으면 전부 도서관 대출이나 전자책으로 읽었으니, 신혼집 책장에 꽂힌 책은 어느 정도 나의 필터를 거친 책이었다. 그래서 더 뿌듯했는지도 모르겠다.
반짝반짝 빛나는 내 눈빛과는 달리 아내는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나로서는 생각해보지도 못한 말이 돌아왔다.
오빠는 책을 이렇게 꽂으면 거슬리지 않아?
거슬리다니. 내가 책을 잘못 꽂았나. 아니. 애초에 잘못될 수 있는 문제인가.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다시 책장을 보았다. 어디에 어떤 책이 꽂혀 있는지 한 눈에 보이도록 잘 정리되어 있었다. 당연했다. 책장 정리를 한다는 마음으로 신경 써서 꽂았으니까. 아내가 곧 이유를 말했다.
안 예쁘잖아.
충격이었다. 책장을 미적인 관점에서 볼 수도 있구나. 살면서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시선이었다. 아내가 구체적으로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가장 먼저 높이가 들쭉날쭉인 게 문제였다. 거기에 책의 두께도 얇은 책과 두꺼운 책이 뒤섞여 있으니, 사실상 마구잡이로 꽂아놓은 것만 같다는 것이었다. 책의 색상과 커버의 재질까지 고려해서 꽂으면 더 좋다는 말까지 들으니, 나로서는 점점 더 차수를 높이는 방정식처럼 풀기 복잡한 문제가 되는 것만 같았다. 이럴 땐 당신이 생각하는 것을 직접 보여달라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나는 책장의 한 칸을 원하는대로 바꿔달라고 아내에게 말했다.
우르르 뚝딱뚝딱. 잠시 책이 쏟아졌다 꽂혔다를 반복했고, 곧 한 칸이 정리되었다. 그제야 나는 아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내의 손을 거친 책장은 마치 예쁜 북카페의 한쪽 벽면을 보는 것만 같았다. 분명 같은 책인데, 꽂는 방법만 달리 해도 이렇게 다른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구나. 이 방에서 책을 읽을 맛이 나겠다며 나는 아내의 감각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내의 손에 뿔뿔이 흩어져 꽂힌 책들을 보며 내가 그동안 책장을 어떻게 정리해왔는지도 깨달았다. 더 이상 책들의 위치가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었다.
A라는 책이 있다. A를 읽는 동안 어느 부분에 궁금증이 생긴다. 이를 보충해 줄 B라는 책을 산다. B를 이해하려다보니, C라는 책도 필요해졌다. C를 산다. C를 독해하는 데는 D가 도움을 준단다. 그래서 D도 산다. 이제 A, B, C, D 총 네 권은 내게 있어서 운명 공동체다. 어떠한 맥락 속에서 그들은 한 곳에 함께 머물러야만 한다는 게 나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미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 책들은 함께 놓일 가능성이 별로 없다. 책의 높낮이와 두께, 색상과 커버의 재질 모두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단순히 책장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느냐의 문제도 아니다. 빙산이 일각처럼,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알려주는 작은 사건일 뿐이다.
아내는 오감이 섬세하게 발달한 사람이라, 세계를 감각적으로 바라본다. 미각과 후각, 촉각과 청각, 그리고 시각까지. 아내의 감각은 마치 성능 좋은 센서와 같다. 나로서는 육안으로 구분하기 어려운 차이를 감각으로 알아채곤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내가 사진이 약간 틀어진 것 같다고 말하면 분명히 틀어졌다. 컴퓨터로 사진에 그리드를 대보아야 알 수 있을 정도의 미세한 차이여도 느끼고 마는 것이다. 내 눈엔 거기서 거기 같아 보이는 데도 말이다. 그러니 아내가 책장을 미적으로 보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와 다르게 나는 세계를 관념적으로 바라본다.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것보단 의미와 논리로 얽힌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서로 연결되어 영향을 주고 받는 것이 주로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이다. 미술 작품을 볼 때도 그냥 예쁨으로 느끼질 못한다. 그림이 어떤 맥락과 의미에서 그려졌는가를 생각할 수 있어야 감동을 한다. 그런 내가 책을 의미 단위로 묶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감각과 관념.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근본적인 차이는 일상 곳곳에서도 소소하게 드러난다. 이를 테면 청소를 해도 차이가 보인다. 아내는 공간을 보기 좋게 정리정돈하는 것에 방점을 찍고,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과 바이러스를 박멸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다. 결국 시간을 들여 다 치우고 나면 결과는 비슷하지만, 정리정돈이 먼저냐 위생이 먼저냐에서 차이가 나타난다. 우리는 이렇게 작은 부분에서도 다르다.
결혼의 위대함은 우리가 이런 것까지 다르구나를 깨닫는 순간에 있다. 우리는 가장 가까운 존재가 나와 이렇게까지 다르다는 현실을 마주하면서 몰랐던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성장은 스스로의 모습을 깨닫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여기서 나아가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고, 다른 세계로 뛰어 들기까지 한다면, 나의 세계는 확장된다. 부부가 서로를 성장시키는 것이다. 만약 반대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거나 거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결혼은 위대함이 아니라 위험성을 키우는 결정이 될 뿐이다. 그러니 다름을 발견한 순간을 두 사람이 모두 의식적으로 잘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아내가 정리해준 책장의 느낌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내게 필요한 맥락으로 책을 가까이 붙여서 다시 꽂아보았다. 마음에 들었다.
나도 조금은 감각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책장을 보며 변화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