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향인 엄마가 육아하는 방법
7년 만에 다시 아기를 키우게 되었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이전과는 너무도 많은 게 바뀌었다. 아이 하나에 맞춰서 내 시간을 분배하고, 그 아이만을 위해 책도 읽어주고 간식도 만들어주던 맞춤형 서비스는 이제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한 아이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으면 또 다른 아이가 자기도 봐달라고 하는 통에 두 아이 모두에게 집중할 수가 없었다. 완전히 다른 스타일로 두 아이의 식사를 준비하고 두 아이를 씻기고 재우고 나면 내 체력도 손목도 너덜너덜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이가 셋인 엄마들을 보면 힘이 넘쳐나는 것 같았다. 아이를 제압하는 목소리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우리 집 아이들보다 별 나보이는 아이가 하나 더 있어도 뭐든 척척 해내는 그녀들이 부러웠다. 아무리 육아 체질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모성애는 보여줘야 한다는 엄마 사람 강박으로 나도 모르게 아이들 앞에서 '아, 힘들어'라는 말을 자주 내뱉었다.
육아휴직이 100일도 안 남은 시점에서 그동안의 육아를 돌아본다.
첫째 때를 생각하면 그땐 어쩜 그렇게 의욕이 넘쳤는지 지금의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루에 문화센터를 두 군데나 다니고, 왕복 한 시간 가까이 버스를 타고 장난감을 빌리러 다녔다. 오로지 아이를 위해서 그 아이가 얼마나 먹는다고 유기농 재료를 사다가 간장도 만들고, 김치, 물김치도 만들었다. 하루 걸러 하루 이웃집 엄마들과 공동육아를 하면서 정말 오로지 육아에 초점을 맞춰서 생활을 했고 '아이'를 어떻게 하면 잘 키울지 그것만 연구했다.
지금은?
유모차로 갈 수 없다면 절대 밖에 안 나간다. 문화 센터는커녕 집에서 가끔 해주는 오감놀이도 너무 벅차다. 장난감은 없으면 없을수록 좋다는 생각이다. 공동육아? 그런 거 없다. 코로나 때문에도 그렇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 집에서 비비고 부대끼면서 지낸다. 하루의 루틴이 잘 잡혀 있어서 아이와 나는 거기에 세팅되어 있다. 집안일은 아이가 깨어있을 때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아이가 자는 시간엔 무조건 나만을 위해서 쓴다. 첫째 때와는 다르게 육아휴직의 시간을 '아이'가 아닌 '나'를 성찰하고, 나를 좀 더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 고민한다.
왜? 나이가 들어서 체력이 달리는 걸까?
맞다. 지금은 에너지가 순식간에 방전된다. 하지만 단순히 체력의 문제나 나이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하기 힘든 일들을 할 때 에너지가 쉽게 방전된다는 걸 지금은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대신 내가 좋아하는 일, 단지 아이만을 위한 애씀이 아닌 아이와 내가 함께 성장하는 일을 할 때는 에너지가 충전된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혼자서 조용히 에너지를 만드는 내향인에게 육아는 피곤하다. 아이와의 생활은 상상 이상으로 소란하다. 잠깐이라도 내 세계에 침잠하려 하면 아이가 나를 불렀다.
...
성심껏 육아하되, 희생의 아이콘이 되지는 말자 다짐했다. 나의 육아에는 '내'가 좀 더 필요했다. 아이에 비해 내가 주도성이 약하고 이타성이 강하니, 그래야만 겨우 반반이 되고 타산이 맞았다.
책 <내향 육아>에 나오는 문장이 가슴에 콕 박힌다.
물론 아이에게 미안한 점도 있다. 올해 초 동네를 이사하면서 첫째 아이 유치원을 옮겼다. 아이는 기존 유치원 친구들을 따로 만나 인사도 제대로 하고, 새로운 동네에 와서 새 친구들도 사귀고 싶어 했다. 7살 아이의 바람 그건 엄마인 내가 나서야지 할 수 있는 과제들이었다. 물론 내 핸드폰에 이전 유치원 엄마들의 전화번호, 그리고 새로운 유치원에서 만난 친구 엄마들의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다.
"우리 아이가 친구를 너무 보고 싶어 하는데요."
하는 메시지 한 통만 보내면 되는 간단한 일이다. 그런데 나에게 이런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평소에 연락도 안 하다가 갑자기 연락을 하는 건 이상하지 않을까? 일하느라 바쁠 텐데 한가하게 만나자는 연락을 해도 될까? 코로나로 유치원도 잘 안 나가는데 따로 만나자고 연락을 하면 무슨 생각이냐고 하지 않을까?...'
내 머릿속에는 이미 상대방의 머릿속을 샅샅이 파헤치기라도 하듯이 무수한 질문들로 복잡하다. 결국 내가 아이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안돼. 나중에 상황이 좋아지면 그때 연락해보자~"라는 그럴싸한 변명이다.
육아 체질이 아닌 것 중 하나는 아이와의 관계보다도 외부적인 관계에 대한 대처가 어려웠던 것도 있었다. 자기 PR시대에 밖에서 누가 우리 아이 칭찬이라도 하면 "그죠? 얘가 그런데 소질이 있더라고요."
하고 얘기하면 되는데
"아 그래요? 그런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라던지 "에이 아직은 모르죠." 같은 말로 아이의 재능을 얼버무리곤 했다.
유치원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몇 분은 엄마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하기 딱 좋은 때다. 동네 소식이나 아이 교육과 관련된 정보도 교환할 수 있고, 친분도 쌓을 수 있는 틈새 시간이다. 그런데 난 그 몇 분 동안 할 말이 없을까 봐 아무 말이나 건네는 그런 형식적인 노력이 싫었다. 그래서 일부러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거나 분리수거를 하면서 셔틀버스가 거의 도착하는 시간에 딱 맞춰 나가곤 했다. 그러면 간단한 인사만 하고 아이를 데려올 수 있었다. 사회생활을 13년이나 했는데, 내일모레면 나이 마흔을 바라보는데도 내가 선택한 게 아닌 관계들은 여전히 어렵다.
그래도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아이는 유치원 생활을 너무나 신나게 잘하고 있다고 했다. 새로 옮긴 유치원에서도 내 염려와는 다르게 며칠 만에 바로 적응을 하더니 그 후로 매일 유치원에 가고 싶다고 하는 아이가 고맙다.
앞으로 아이는 엄마인 나의 품에 숨고 싶고, 나를 방패 삼아 하고 싶은 일들이 많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아이에게 지금처럼 그럴싸한 변명을 할 것인가. 아니면 솔직하게 엄마는 할 수 없으니 네가 해결해야 한다고 또박또박 알려줘야 할 것인가. 내 성격이 갑자기 변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나는 후자를 택할 것이다.
첫째였던 나는 자라면서 동생에 비해 과잉보호를 받았다. 엄마는 엄마의 시간을 오롯이 나를 위해 썼고 뭘하든지 나보고 함께 하고자 했다. 왜 엄마는 엄마 혼자 놀지 않을까? 어린 생각으로 그게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나는 아이와 함께일 때도 '따로 또 같이'를 중요시 한다. 아직은 좀 어렵겠지만 가능하면 각자의 시간을 사용하려고 노력한다. 아이가 혼자서 할 수 있는 문제는 혼자서 해결할 수 있게 지금부터 연습 시키고 싶다. 아이 입에서 '엄마 때문에 못했어'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있다. '어릴때 친구=엄마친구' 라는 말도 있지만 그게 도대체 언제까지 적용될 것인가.
아이가 둘이 되니 더욱 그런 생각이 강해진다. 그냥 우리 각자 할 수 있는 걸 열심히 하자는 생각. 2살, 7살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게 너무한가 싶기도 하지만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건 어쩌면 그리 많지 않다는 걸 어렸을 때부터 가르치고 싶다. 대신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즐거운 일들에 에너지를 쏟고 싶다. 내 시간을 보내면서 충전한 에너지를 두 아이와 집에서 마음껏 뒹굴면서 발산하고 싶다.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오롯이 우리만의 방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