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이 필요한 이유
“어머님 옷 걸어드릴까요~?”
약속 장소에 제일 먼저 도착해서 겉옷도 안 벗고 테이블에 앉아있으니 레스토랑의 젊은 남자 직원이 다가와 나긋나긋하게 말을 걸었다.
‘엥? 나말인가. 내가 왜 어머님이야! 거참 센스 없네.’ 속으로는 직원의 호칭에 당황하기도 하고 화도 나서 구시렁대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밝고 경쾌하게 “네! 감사합니다”라고 응답하며 코트를 건네주었다.
코트를 벗고 보니 내 모습이 더욱 또렷하게 보였다. 평소보다 신경 써서 나름 블랙으로 색을 통일하여 스커트도 입고 구두도 신었지만 앞에서 봐도 뒤에서 봐도 아기띠를 매고 있는 난 그 누가 봐도 애엄마였다. 그래 맞네, 나 어머님 맞는구나.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니 커플을 제외한 식당 안 손님의 80프로는 내 또래 거나 나보다 조금 더 나이가 있는 여자 손님들이었는데 그중 아이와 함께 온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점심 3시간, 저녁 3시간만 딱 운영하는 이 레스토랑은 의자도 테이블도 딱딱하고, 음식의 양에 비해 가격도 다소 딱딱하기 때문에 아이와는 멀리 떨어져서 혼자 힐링하면서 식사를 해야 할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너 나올 수 있어? 애기 데리고 카카오 택시 타고 오면 안 돼?"
여느 날처럼 애 낮잠시간에 함께 잠을 자고 있는데 오랜만에 아는 언니에게 연락이 왔다.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내 사정을 알지만 오랫동안 못 봤다며 아쉬운 마음에 잠깐 와서 밥만 먹고 가면 어떻겠냐는 전화였다. 대학 때 어학연수를 가서 만난 언니 둘과는 자주는 못 만나도 연말에는 꼭 짬을 내서 만나온 사이였다. 잠시 고민했지만 알겠다고 꼭 가겠다고 했더니 한 시 반에 예약해놨다며 메시지가 왔다.
"거기 꼭 가야 돼? 청담동이면 왕복 택시비 5만 원은 나올걸. 그리고 미세먼지 나쁘다고 경보까지 울렸는데 애를 데리고 너무한 거 아니야"
역시 남편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나도 웬만하면 안 나려고 했는데 언니가 상해로 발령 나서 4년 동안 못 볼 거 같아서. 가봐야 할 거 같네."
언니의 발령은 사실이었지만 그건 핑계에 가까웠다. 그보다는 도산대로변에 자리한 미쉐린 가이드에 소개된 유명 셰프의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게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드디어 약속의 날. 미세먼지는 상당히 나쁨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둘째는 감기에 걸려 콜록콜록거렸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건 날씨가 그리 춥지 않았고 콜택시가 바로 와주었다는 것.
'오후 네시에 네가 온다면 나는 세시부터 행복해지겠지'라는 어린 왕자 책에 나오는 유명한 문구처럼 택시에 타자마자 나는 이 모든 걸 잊고 행복해졌다.
좋은 신발은 좋은 곳으로 데려다준다고 하는데 나의 경우엔 좋은 사람들이 나를 맛있는 곳으로 데려다주었다. 언니들과의 대화는 역시나 즐거웠고 근사한 식사 덕분에 점심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언니들은 만난 지 두 시간 만에 각자 일정이 있어 헤어질 수밖에 없었지만, 난 바로 발걸음을 돌리기 아쉬워 혼자 식당 옆 베이커리 카페에서 후식으로 빵과 커피를 먹으며 여운을 달랬다. 이 가게도 인기가 많은지 젊은이들로 자리가 거의 다 찾는데 역시나 아기와 온 사람은 나뿐이었다. 소문에 비해서는 커피맛도 평범했고 카페 분위기도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지만 내가 있던 자리의 공기는 바깥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아이와 나오는 게 귀찮다고 주저했다거나 감기 걸린 아이를 걱정하는 마음에 약속을 취소했다면 느낄 수 없었을 것들이다. 그래 용기 내서 나오길 잘했어.
"너 거기에 꼭 가야겠니? 그 가수가 누군데. 이서방도 바쁘다면서 혼자 거길 왜 가는 건데."
지난달, 오십일 된 둘째를 남편에게 맡기고 혼콘을 다녀오겠다고 하니 친정엄마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잔소리를 하셨다.
"엄마 이 가수 엄~~~ 청 유명한 가수란 말이야. 꼭 가야 돼!"
지인이 예매해둔 콘서트 표가 있는데 사정이 생겨 못 간다고 양도받겠냐고 연락이 왔다. 그건 무려 예매 시작과 동시에 3분 만에 매진됐다는 그 유명한 김동률 콘서트 표였다. 아직 모유수유 중인 나는 저녁 시간 콘서트에 가게 될 경우 둘째가 밤잠을 잘 잘 수 있을 것인지, 월요일 저녁 남편이 일찍 와서 아이 둘을 맡아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가겠노라고 대답했다. 다행히 내가 김동률 왕팬인 걸 아는 남편이 일찍 퇴근해서 두 아이를 맡아주겠다고 한 덕분에 나의 밤마실은 가능하게 되었다.
혼자 영화 보고 밥 먹는 건 잘하는 나도 혼자 콘서트 보는 건 처음이었던지라 얼마나 떨렸던지. 거기다 이번 콘서트는 내가 평소에 애정 하는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한다니 그 설렘이 배가 되었다. 팬카페에서 단체로 맞춘 티까지 구해서 입고 광화문 거리를 걷는 데 그날 밤 그 거리의 풍경은 내가 이십 대에서 보던 활기찬 거리 그대로였다.
150여분의 공연시간 내내 숨죽이며 집중하는 동안 남편은 '왜 우는지 모르겠다' '분유를 줬는데 또 운다' '왜 잠을 안 자는 거지?' 등등 혼자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법한 내용의 카톡을 수시로 보내며 나를 방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연을 다 보고 나서는 여기 오길 정말 잘했다고 남편에게 고맙다고 답장을 보냈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나 스스로에게도 쓰담쓰담해주었다. 혼콘을 해보자는 내 용기 덕분에 눈과 귀뿐만 아니라 내 가슴이 이렇게 호강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둘째의 임신과 출산 후 오늘까지 그동안 지금처럼 무언가에 빠져 집중한 시간이 있었던가. 오롯이 나를 위한.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 우리 엄마는 일도 안 하셨는데 비 오는 날 우산을 가지고 학교로 온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왜 안 왔냐고 물어보면 뭐 하다가 못 갔다고 친구랑 같이 우산 쓰고 오면 되지 않냐고 태연하게 말씀하시곤 했는데 신기하게도 나 역시 별로 속상하지가 않았다. 엄마 말대로 친구랑 같이 우산을 쓰고 집에 가는 게 재미있었다.
수능 준비로 학교에서 밤늦게까지 야자(야간 자율학습)를 하고 독서실까지 들렀다 집에 12시가 다 돼서 들어가던 고3 때도 마찬가지였다. 늦은 밤 내가 직접 현관문을 열고 귀가했다. 그 시간 엄마는 내가 온 줄도 모르고 방에서 주무시고 계셨는데 그때도 이상하게 난 하나도 서운하지가 않았다.
오히려 나이 들어 엄마가 손주 봐준다고 피곤해한다거나, 두 딸들 준다고 혼자 김장이며 반찬이며 바리바리 다해놓고 기다리고 있을 때가 훨씬 속상했다. 차라리 어렸을 때처럼 엄마 일 있으니 애 못 봐준다고, 반찬 할 시간 없으니 사 먹으라고 했다면 내 마음이 더 편했을 텐데.
엄마가 당신 일을 희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당신이 행복한 일을 할 때 자식들은 더 편안하다는 걸 우리 엄마는 알까. 그래서 나도 자식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먼저 하려고 한다는 걸 우리 아이들은 이해해줄까. 완벽한 엄마 말고 그럭저럭 괜찮은 엄마로 살기로 했음을 고백한다면 아이들은 뭐라고 대답해줄까. 네가 백일도 되기 전 감행한 엄마의 외출이 긴 육아기를 버틸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준다는 걸, 다시 또 너와 눈을 맞추고 까르르 웃을 수 있는 에너지를 충전하는 시간이라는 걸 우리 둘째는 알아줄까.
“아니 이 멀리까지 애기 데리고 어디 다녀오세요?”
청담동에서 택시를 탔더니 기사 아저씨가 대뜸 물어보신다.
“저요? 그냥 잠깐 외출 나왔다 돌아가는 길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