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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릭 Jun 27. 2018

배려심 깊은 남자.

저만치 여자는 건너편 식당에서 일행들과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중이었다. 기다렸던 그녀의 표정을 확인했을 때, 남자는 그동안 여자에 대한 걱정으로 한껏 졸여졌던 가슴이 단번에 쫙 펴지는 것을 느꼈다. 여자의 머리 너머로 장마가 지난 하늘이 맑게 빛나고, 그녀가 내딛는 거리는 가벼워진 행인의 발걸음들로 살짝 들떠있었다. 


그들이 걸어 내려오는 길이 한눈에 들어오는 카페에서 남자는 한 시간이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녀와 이별을 한 뒤로 남자는 여자가 슬픔에 잠겨있지 않을까 항상 마음 한 구석이 불편했었다. 그녀 특유의 유쾌한 표정에 남자는 안도감을 느끼며 마음속으로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지난밤 술자리에서 증권사에 다니는 한 친구는 헤어진 여자의 아무렇지 않은 웃음만큼 씁쓸한 건 없다며, 이건 이미 털고 나온 종목의 주가를 확인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리석은 짓이라고 남자를 쏘아붙였다. 그리고는 술을 마시는 동안 말끝마다, 이건 정말 아니라며 몇 번이고 궁시렁댔다. 그녀가 잘 지내고 있는지 확인해야만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는 남자의 말에 그 친구는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 술이 잔뜩 오른 그의 게슴츠레한 눈빛은 이미 남자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거란 게 분명했지만, 그와 헤어지면서 남자는 여자가 보고 싶어서 이러는 건 절대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해 두었다.      


‘하긴! 매일 숫자나 통계를 보며 이해타산이나 맞추는 놈이 인간의 깊숙한 내면에 대한 이해로부터 오는 연민이라던가, 불가항력의 운명이 가져다주는 비극의 난해함 같은 걸 결코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 그래! 녀석의 수준으로는 그것들의 깊숙한 곳에서 비롯되는 타인에 대한 배려를 쉽사리 이해할 리가 없겠지.....’      


남자가 지난밤 친구의 기분 나쁜 훈계를 떠올리며 웅얼거리는 동안,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이상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 멀리 창밖으로 보이는 여자의 모습과 자신의 생각에 몰입한 탓에 남자는 자신의 입에서 무슨 주문이라도 외는 듯한 말소리가 새어 나온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자신의 이러한 행동이 끝맺음을 모르고 매달리는 거추장스런 추태라거나 불필요하게 감정을 소비하는 미련한 행동으로 오해받는 것 따위는 조금도 상관이 없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현재 중요한 것은 그녀와의 이별을 되돌릴 만큼 현실이 녹록지 않다는 것과, 그동안 바뀌었거나 바뀔 조건이란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그 스스로 아주 정확하고 냉철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남자는 다만 연민과 배려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자신이 주체할 수 없는 근심을 조금 들어내고자 했을 뿐이라고, 그날 외근을 핑계로 이곳 여자의 직장 근처까지 찾아온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사랑했던 연인의 일상이 망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평정심을 찾으려는 욕심이 그리 비난받을 행동은 아니지 않는가라는 변명은 어느새, 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안녕을 걱정하는 자신의 태도야말로 오히려 인간으로서 지닐 수 있는 최상의 예의일 수도 있다는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동안 가졌던 걱정과는 달리 너무나 평온하기만 한 상황에 안도하며, 남자는 느긋해진 기분으로 커피 잔을 들이켰다. 진한 만델링의 쌉쌀함이 혓바닥으로 기분 좋게 스며들었다. 화창한 날씨, 한가로운 커피숍, 경쾌하게 울리는 보사노바. 연인과의 깔끔한 이별에 대한 분명한 상황인식과 그 뒤로 찾은 마음의 여유로움. 남자에게 모든 것은 순조로워 보였다. 그건 아주 잠깐 동안이었지만 그는 진심으로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어쩌면, 그가 인지한 상황들 중 단 한 가지 요소를 제외하면 정말 그랬을 수도 있었다.      


아까부터 그녀의 일행 중 한 사내의 모습이 남자의 눈에 거슬렸다. 남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음흉함을 감추고 있는 저 느글거리는 표정이며, 모든 사람이 자신에 대해 호감을 가졌을 거라 여기는 저 거침없는 행동이며, 말하면서도 사라지지 않는 저 자신만만한 웃음이 그는 점점 더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 사내는 끊임없이 여자에게 치근거리고 있었다. 음료수를 건네며 쓸데없이 귓속말을 해대더니 이젠 뒤편에서 다가오는 오토바이를 구실로 은근슬쩍 그녀의 어깨에 손까지 대고 있었다.      


여자가 마지못해 웃고 있다는 것을 남자는 표정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저따위 녀석의 태도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녀가 처한 난처함은 이제 남자가 나서야 할 지점으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다는 것은 얼간이라도 알만한 것이었지만, 남자는 당장에라도 달려가 저 사내 녀석의 갈비뼈를 부셔버리고만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런 갑작스런 감정에 사로잡힌 자신을 깨닫게 되자, 남자는 순간 어리둥절한 기분에 빠져 들었다. 남자는 자신 같은 이성적인 사람에게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이러한 과격함에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그녀와 일행이 사라지고 나서도 남자는 한참 동안을 조용하게 그리고 아주 신중하게 커피 맛을 음미하며 자신의 낯선 마음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남자는 마침 자신의 손에 커피가 들려있다는 사실에 새삼 감사했다. 노아로 하여금 그 자식들에게 벌거벗은 몸뚱이를 보여주게 만든 술의 무분별한 도취성과는 달리, 커피는 그 역사의 시작에서부터 중동의 수도승들의 새벽 명상을 위해 정신을 맑게 각성하도록 하는 용도로 출발한 것이었다. ‘감히 이성과 합리성을 향한 구도자의 음료라 칭할 만 하지.’ 그는 완전히 스스로의 감정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선 자신에게서 뿌듯함을 느꼈다.      


어느새 커피가 완전히 식어버렸지만 남자는 상관없었다. 이날 그의 메뉴 선택은 탁월했으며 진정한 커피의 맛은 오히려 식었을 때 드러난다고 것이 그의 평소 지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 남은 커피를 모두 입안에 들이켰을 때, 이상하게도 조금 전까진 느껴지지 않았던 목 넘김 뒤끝에 약간 잡맛 섞인 탄 맛이 혀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갑자기 조금 전까지 만족했던 커피 맛은 속임수였다는 배신감에 그는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생두를 이렇게 망쳐놓고서 자가배전샵이란 간판을 내걸다니!’ 남자는 가게를 나가기 전에 커피를 내려준 바리스타에게 무슨 말이라도 한마디 해야겠다는 생각이 치밀어 올랐지만, 그날 그 자신이 처한 특별한 상황을 고려해 신사답게 참기로 결정했다. 남자는 스스로 그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사람이라 자부하고 있었다. 현상에 대한 정확한 분석력을 바탕으로 한 이성적 판단력을 갖춘, 거기에다 아주 인정 많고 배려심이 넘치는 그런 남자. 그는 개운치 않은 느낌을 떨치려고 가만히 심호흡을 했다. 그의 옆 테이블에선 다시 사람들이 이상한 눈빛으로 남자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 Mi Manchi - Andrea Bocel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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