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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릭 Jun 28. 2018

멍청이가 아니라면

미리 말해두자면, 여자는 그 남자의 활동영역 내에서 그의 시선 속에 자신을 지속적으로 노출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것은 사실 그녀가 의식적으로 계획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존심은 강한 반면 주어진 조건에는 순응하려는 다소 모순적인 성향을 지닌 여성들에게서 쉽게 관찰되는 본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녀는 수영장 로비에 앉아 좀처럼 정리되지 않는 생각과 감정들에 휩싸인 채로, 제대로 상황이 굴러가는 지도 알지 못한 채 지금껏 자신을 이끄는 감정에 충실했던 그 모든 노력들이 실은 헛된 것이었다는 좌절감에 맞닥트려져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여자가 남자의 고교 동창과 대학 절친이라는 한 협력업체 홍보담당자로부터 입수한 정보, 즉, 남자가 몇 년째 하루도 빠짐없이 퇴근길에 지하철 근처 체육센터를 들러 수영을 한다는 사실을 우연히 엿듣게 된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으로는 순식간에 앞으로 그녀가 취해야 할 행동절차들이 그려졌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지난번 휴가를 보냈던 해변에서조차 단호하게 물속에 들어가기를 거부했던 여자가 무려 한 달이 넘도록 상사의 눈치를 봐가면서까지 수영장을 다니게 된 이유이자, 지금 여자가 서러움이 북받쳐 오르게 된 원인이었다.      


사태들은 우연에 의해 결합되지만 그 결합의 성격은 이미 그 사태들의 속성에 내포되어 있는 것처럼, 그 결정은 여자가 남자를 처음 본 그 순간부터 정해져 있었던 셈이고, 그러고 보자면 그 서러움 또한 순전히 그녀 탓이랄 수도 있겠지만 좌절감에 직면한 당사자에게 이런 상황으로 자신을 몰아온 모든 인과적 연결고리는 단지 세상이 지닌 불합리일 뿐이었다. 여자는 남자와의 접점에 몰두한 나머지 사소한 것들은 대충 넘겨짚었던 것이다. 무릇 확연해 보이는 사건들은 간과하기 쉬운 작은 단서들에 의해 드러나는 법이다.     


여자가 기억하지 못할 뿐, 수영실력에 따라 반이 정해진다는 건 등록하던 날 카운트 직원으로부터 이미 들었던 설명이었고, 강습이 시작되고서야 알게 된 것이긴 하지만, 남자가 이미 상급반에 속해있다는 사실 또한 생각해보면 처음 협력업체 직원의 말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을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여자의 몸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 풀장에서,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며 스스로도 수없이 반문하며 보내는 50여분의 시간 동안, 남자와는 눈 마주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는 건, 그녀로서는 실로 어처구니없으면서도 대단히 부당한 처사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느끼는 좌절감의 근원은 한 달 전이나 지금이나 겨우 남자의 영역 테두리에 살짝 발을 걸친 상태에서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는 점이었고, 그 보다 더 심각한 건 여자의 눈에는 앞으로도 나아질 가능성이라곤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는 현실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처지에 대한 안타까움과는 별개로, 이러한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은 순전히 그녀에게 원인이 있었다.    


의욕에 넘쳤던 처음엔 그래도 희망이란 게 있었다. 그땐, 저 멀리 시원스럽게 입수를 하며 물살을 가르는 남자를 바라보며 여자도 풀장 가장자리에 앉아 열심히 물장구를 쳤었다. 그와 같은 라인에서 함께 물살을 가르는 자신의 모습은 그녀가 상상만 해도 짜릿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바램과 그것을 위한 그녀의 노력은 서로 완전히 무관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 여자는 조금씩 눈뜨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그녀는 사건과 사건들 사이의 논리성에 관한 근본적인 회의론적 입장에 자신도 모르게 천천히 다가서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애초에 그녀가 품었던 희망이란 것이 왜 싹만 틔운 채로 더 이상 자라지 않을까 살펴봤더니, 자라기는커녕 언제부턴가부터 이미 노랗게 말라가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한 셈이었는데, 그러고도 계속 물과 거름을 주는 것을 멈추지 못한 채 완전히 말라죽을 때를 기다리는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서 여자는 깊은 낙담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여자의 몸은 물의 부력과 저항력에 적응하는데 아주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녀 자신이 운동신경이 썩 좋지 못하다는 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이토록 절망적일 거라고는, 더욱이 그것이 남자 근처로 다가가는데 결정적인 장애가 될 거라고는 여자는 조금도 생각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그녀에게 부력은 하체 쪽으로만 몰리고, 저항력은 아래쪽으로 나아가는 데에만 쓸모가 있었다. 그 결과, 여자가 의욕적으로 팔다리를 휘저을 때마다 그녀의 코와 입안으로 칼칼한 소독 냄새 가득한 물이 빨려 들어가고 두 다리는 애처롭게 허공을 가르는 현상이 빈번하게 발생했던 것이다. 처음부터 짜증 날 정도로 장난을 걸어오던 강사의 느끼한 눈빛조차도 이제는 측은함이 담긴 침묵으로 바뀌어 있었고, 이는 그녀를 더욱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지금, 여자는 수영장 로비에 앉아 특별할인기간이라는 유혹에 3개월짜리를 덥석 등록한 자신을 원망하고 있었다. ‘강습풀에서는 이제 몸풀기를 시작했겠지....’ 땀이 식어가며 기분 나쁜 서늘함이 그녀의 등을 파고들었다. ‘이것도 병이지.... 뭘 대단한 걸 하겠다고 한 여름에 달리기라니....’ 여자는 수영시간을 맞추기 위해 지하철역에서부터 전력으로 달려온 터였다. 다행히 가까스로 시간은 늦지 않았지만, 정작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식은땀이 흐르고 맥이 풀려 그녀는 소파에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새삼 학창 시절뿐만 아니라 직장에도 지각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여자는 그런 고지식한 자신마저도 원망스러웠다. ‘수영장에 오면서 힐에 원피스라니....’ 여자는 발목에 난 스트랩 자국을 살피다 다시 설움이 북받쳤다. 모든 것들이 짜증 났다. 습하고 후덥지근한 날씨며, 발목을 조이는 힐이며, 처음 입은 날 땀에 흠뻑 젖어 눅눅해져 버린 원피스며, 운동신경이라곤 없는 이 저주받는 몸뚱이며, 무엇보다 눈치라고는 코딱지만큼도 없는 그 남자 때문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지경이었다.      


강습 시작시간이 십여 분을 넘길 때까지 여자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넋이 나간 표정 뒤로 온갖 짜증과 자책, 분노와 설움을 오가다 결국 여자는 체념에 이르렀다. 환불이고 뭐고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을 거란 결심으로 힘겹게 일어서며 백을 걸쳤다. ‘바보같이 이런 걸 매고 이까지 달려왔다니....’ 내일 오전 미팅 때문에 잔뜩 쑤셔 넣은 서류들의 묵직함이 그녀의 어깨를 짓눌렀다.      


입구를 지나 몇 걸음을 옮기지 않아 그녀가 비틀거렸다. 조금 전 자신이 뚫고 온 열기 가득한 거리의 기억 때문인지, 아니면 식어버린 땀이 남긴 오한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지금까지 쏟아낸 온갖 설움과 함께 빠져버린 기운 탓인지 여자의 몸이 자꾸만 주저앉으려 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멋대로 기우는 몸을 가누려 하자 순간 여자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리고 그와 동신에 여자의 눈앞에 느닷없이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는 계단 아래에서 급히 올라오려다 말고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상황이 이해되지 않은 여자는 어리둥절한 기분이 들었다.      


그토록 기다렸던 자신에게 집중된 남자의 시선 때문인지, 여자는 몸에 힘이 빠지면서 오히려 편안해짐을 느꼈다. ‘흥! 왜 갑자기 나를 그렇게 보니. 이 매정한 사람아...’ 남자가, 아니 계단 전체가 흔들리며 여자의 시선이 흐려지고 있었다. 여자에게는 그 장면이 마치 지난해 동생이 사 온 장난감같이 생긴 로모카메라로 찍은 사진처럼 보였다. ‘이게 뭐지... 내가 당신을 찍었던 적이 있었던가....’ 뭔가 비현실적이라는 기분이 들었지만 자신을 향한 남자이 눈빛에 취한 여자는 그게 어쨌든지 아무래도 좋았다. 남자가 뭐라고 말을 하며 자신에게로 달려왔다. ‘뭐라고요.... 날 지금까지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건가요....’ 그녀의 눈앞이 완전히 흐려지면서 몸이 가벼워졌다. 이상하게도 여자는 자신이 남자의 품에 안겨드는 기분이 들었다. 뭔가 소란스럽지만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들이 들리다 말다 이내 사라졌다.      


흔들림을 느끼며 다시 의식이 돌아왔을 때, 여자는 어디론가 달려가는 남자의 등에 업혀있다는 걸 깨달았다. 살짝 오한이 느껴졌지만 남자의 등으로 전해지는 온기가 여자의 몸을 편안하게 했다. 땀에 젖은 어깨 위로 기분 좋은 남자의 체취가 풍겨왔다. “이쪽으로!” 키가 작고 목소리가 유난히 밝았던 카운터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내가 기절했었구나... 더위를 먹었던 걸까....’ 상황을 깨닫자, 곧 여자에게 창피함이 몰려왔다. 하지만 여전히 머리는 어질거렸고 나른한 몸은 그냥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기를 원하고 있었다. 남자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직원이 엘리베이터 버턴을 누르며 남자에게 말했다. “아셨죠? 5층 오른쪽 복도 끝이에요. 저도 정리하고 금방 올라갈게요.”      


여자는 완전히 정신을 차렸지만 잠자코 있었다. ‘이 상황에서 내려달라는 게 더 민망한 일이잖아...., 대체 이게 무슨 꼴이람! 아... 몰라...’ 띵-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여자를 엎은 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닫히는 동안 여자의 본능이 순간적으로 그녀에게 현재 벌어진 상황들을 정리해 주었다. ‘그렇지! 이게 그리 나쁜 일은 아니란 말이지....’ 이것은 어찌 보면 여자에게 한 달간의 노력의 결실이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지금 상황은 완벽하게 당신이 나를 구한 거잖아... 고맙게도!’ 이제 여자가 주도적으로 남자에게 나선 대도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 마련된 셈이었다. 여자는 그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의 한 증거로 삼을만한 사례를 스스로 체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는 엘리베이터가 작동하는 소리를 들으며 앞으로 벌어질 일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그녀가 벌일 계획들의 온갖 가능한 순서들을 조합하고 있었다.


‘난 이제 이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당연히 너와 약속을 잡아야겠지. 아마 그곳은 아주 멋지고 분위기 있는 맛집이 될 거야. 그리고 당신이 내가 짐작하는 매너 있는 남자라면 당연히 얻어먹고 난 뒤에 입을 싹 닦지는 않겠지. 그러다 보면 넌 조금씩 나의 진가를 깨닫게 될 거야. 그러고도 네가 나의 매력에 빠져들지 못한다면 그땐 상관 안 해. 그렇다면 넌 센스 없는 멍청이 거나 기회도 잡지 못하는 미련 곰탱이일 테니까.’ 이제는 썩 나쁘지만은 않은 어지러움과 오한이 다시 그녀에게 몰려왔다. 여자는 남자의 체온을 좀 더 느끼려는 듯, 고개를 돌려 붙이며 살짝 남자의 등 위로 몸을 웅크렸다. *


# 초콜릿 - 볼빨간사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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