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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릭 Jul 04. 2018

피어난 계절

저만치 레인 바닥으로 이어진 파란선의 끝이 보인다. 거리를 가다듬어 숨을 모았다가 몸을 비틀며 다리를 모은다. 뽀그르.... 잠시 중력이 사라진 듯한 기분과 함께 빙그르 세상이 돌고, 발끝으로 미끈한 타일의 감촉이 느껴지면 웅크린 허벅지와 종아리에 힘을 한껏 실어 벽면을 밀어낸다. 슈우욱.... 온몸을 따라 미끄러지는 물의 감촉이 아늑하다. 뽀그르.... 바로 곁을 지나는 한 남자의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오던 공기방울이 떠오를 여유도 없이 뒤이어 두 다리가 일으키는 물살에 빨려 들고 있다. 나아가던 속도가 떨어지기 전 미리 몸을 떠올린다. 수면에 닿자마자 고개를 돌려 후웁- 수면 위의 공기를 빨아들이며 오른팔을 꺾어 올린다. 한껏 팔을 앞으로 뻗는 동시에 왼팔로 물을 끌어당겨 옆구리 쪽으로 밀어내고, 그 움직임을 따라 리드미컬하게 다리로 물을 차 내면 몸은 물살을 가르며 다시 속도를 높인다. 피부로 전해오는 물의 흐름에 완전히 몸을 맡겨 끊임없이 동작을 연결해 나아간다.  

   

어느 듯 들이쉬고 내뱉는 숨이 고르다. 열 바퀴 이상을 돌고 나서야 호흡이 안정된다는 건 아직 자세에 힘이 많이 들어 있었다는 증거일 테다. 근육들의 수축과 이완, 그 동작을 지속시키려는 의지가 맞물려 작동하면서 불러일으키는 만족감. 평소엔 아무런 생각 없이 내뱉는 공기를 이렇게 의식적으로 조절해 다시 새로운 움직임에 맞춰질 때의 쾌감은 야릇하다. 공기와 물로 나눠진 세상 속에서 그 접점을 가르는 움직임만 존재하는 격렬함과 적막감의 합일이 주는 자유로움. 이때가 되면 가장 호흡이 자연스러워지면서 힘겨워하던 팔다리가 가뿐해진다. 힘들이지 않고서도 움직임이 수월해지고 속도에 맞춰 힘이 낭비 없이 전달된다는 기분과 함께 신체적 압박감과 그것을 이겨내려는 심리 사이의 균형점에 놓인다. 스스로 강요한 제약조건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유를 느낀다는 건 묘한 일이다. 빙글.... 다시 턴.    

 

코에서 뿜어져 나오는 공기방울이 가슴을 타고 흘러내린다. 잠시 물속 깊숙이 잠겨, 온몸을 쭉 편 채로 두 다리를 흔들며 속도감을 느껴본다. 고요함 속으로 수면 여기저기 떠다니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평화롭다. 바퀴가 거듭될수록 뿌옇게 흐려지는 시야는 항상 아쉽다. 이 싸구려 수경으로 물속을 깨끗하게 볼 수 있는 건 고작 너덧 바퀴 정도가 전부이다. 뭐, 비싼 걸 산다한들 고작 한두 달이면 마찬가지니까.... 그래도 수면의 움직임에 따라 일렁거리는 물의 빛깔은 뿌연 시야 속에서도 결코 질리지 않는다. 참을 수 있는 만큼 숨을 참으며 물속을 헤엄치다 다시 수면으로 고개를 내밀며 손을 뻗기 시작한다.


경쾌한 물소리, 거친 호흡과 함께 동작은 기계처럼 반복된다. 그러나 반복되는 움직임 속에 나타나는 미묘한 변화들을 찾아내는 데 게을러선 안 된다. 좋은 동작은 다음번에 이어지도록, 나쁜 동작은 다음번에 제거되도록 끊임없이 몸에 각인시켜야 한다. 근데 지금은 몇 바퀴째인 걸까.... 열다섯 바퀴가 넘은 건 확실한데 열여섯 바퀴째인지는 불분명하다. 매번 여기서 헷갈리는 건 또 왜일까.... 망각도 일종의 습관일 수 있을까.... 그냥 열다섯 바퀴로 정하기로 한다. 아직 교대로 팔을 젓는 어깨가 가볍고 적당히 힘이 들어간 허벅지도 가뿐하다. 이대로라면 종일토록 헤엄칠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이런 기분이 들 때면 바다 한가운데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를 상상한다. 망망대해.... 오로지 느껴지는 거라곤 나의 움직임과 물살이 전부 인, 지금 이 순간을 제외하곤 그 어떤 생각도 끼어들 틈이 없는 생생함. 마치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껏 이렇게 물살을 헤쳐 온 것만 같다. 뽀그르.... 다시 턴. 아드레날린이 차오른 근육들이 좀 더 극한으로 몸을 밀어붙이길 원한다. 하지만 아직 다섯 바퀴가 더 남았다. 신기한 일이다. 고통을 느끼던 몸은 고통을 즐기게 되었지만, 그 고통을 즐기려면 그 즐거움을 자제해야만 한다. 지금의 페이스를 유지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만 원하는 속도로 원하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점점 호흡을 위해 힘을 주어야 하고 팔다리는 원하는 만큼 물을 쳐내지 못한다. 속도를 유지하기 위해 몸의 모든 기관은 느껴지는 고통까지도 연료로 태워내고 있다. 마지막 스물 바퀴, 어쩌면 스물한 바퀴 째를 채우고 돌아오는 동안, 미리 차오른 성취감이 몸에 여분의 연료를 주입한다. 다시 한 바퀴를 더 돌 것인지 이대로 깔끔하게 마칠 것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점점 육체적 압박을 이겨내며 쾌감이 오른 몸이 오히려 익숙해진 고통을 떨쳐버리기 아쉬워하는 까닭이다. 이처럼 성취감은 종종 더 높은 성취를 요구한다. 그것은 결과라기보다는 일종의 습관에 가깝다. 마지막까지도 턴을 고민하는 순간, 뿌연 수경 너머로 익숙한 수영복의 실루엣이 맺혀 든다. 그녀일까....


레인 끝에 다다르자마자 풀장 턱 위로 팔을 걸치고 배수구에 입안의 물을 뱉어낸다. 깊은 숨을 몇 차례 내쉰 다음, 수경을 벗어 올리며 수영복의 주인을 확인한다. 역시 그녀다. “안녕하세요.” 그녀가 먼저 웃으며 인사한다. 아.... 활짝 핀 꽃 같은 표정. 왜 갑자기 올봄 출근길의 장면이 그려지는지 모를 일이다. 일제히 꽃망울을 터트렸던 가로수의 꽃잎들이 그녀 주위로 그려진다. 느닷없이 수영장에서 피어난 계절을 맞닥트린 기분이 생뚱맞다. “네....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자 그녀가 살짝 눈인사를 건네고는 수경을 눌러쓰고 물속으로 잠겨 든다.


# 봄이다 - 두번째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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