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게에 들어선 남자는 구석자리에 앉은 여자를 금방 발견했다. 여자는 벌써 맥주를 반 병쯤 비워두고 치킨을 뜯는 중이었다.
“아직 할 일 남았다는데 꼭 이렇게 불러내야겠냐?”
남자가 한쪽 의자에 가방을 내려두며 자리에 앉았다. 여자는 대꾸도 없이 홀에 서있는 직원에게 손을 들었다.
“여기요! 맥주 두병 같은 걸로 추가해 주세요.”
“이거 우울하다는 건 핑계고 술값 뜯어내려는 거 아냐?”
남자의 말에 여자가 발끈했다.
“이 자식아, 네 말에 책임을 져야지? 걔가 나한테 관심 있는 게 분명하다며? 그동안 괜히 나만 헛물켜고 마음 설렜잖아!”
“난 사실대로 말해준 거 뿐이야. 관심도 없는 사람이 그동안 너한테 왜 그랬겠냐?”
남자도 닭다리를 하나 집어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와삭- 바삭한 튀김옷이 바스라지는 소리가 났다.
“오, 여기 맛있네.”
“근데 어떻게 하루밤새 딴 년을 만나냐, 응? 남자 새끼들은 다 이렇게 줏대가 없는 거야?
“새끼가 뭐냐 새끼가... 말 좀 곱게 쓰랬지 내가.”
“내가 지금 열 안 받게 생겼냐? 실컷 썸탈 땐 언제구 주말 사이 갑자기 떡하니 여친이 생겼다는데. 더 심한 단어들이 튀어나오려는 걸 내 모든 지성을 동원해 막는 중이라구.”
직원이 추가한 맥주를 가져다주었다. 칙- 남자가 뚜껑을 따서 마시려는데 여자가 남자의 손을 찰싹 때리고는 병을 빼앗았다. 여자는 냅킨으로 주둥이를 감싸 몇 번을 돌려 닦고는 남자에게 건네며 다시 투덜댔다.
“날 좋아하는 거 맞다며? 이번엔 신중해야 한다며? 그래놓구선 딴 여자랑 소개팅을 하냐? 이게 말이 돼? 나 참 얼척 없어서.....”
여자는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고는 쿵- 탁자가 울리도록 병을 내려쳤다.
두 사람은 같은 과 동기이자 함께 대학원에 진학한 오랜 친구였다. 남자가 새로 채용된 교수의 연구실로 자리를 옮기기 전까지 두 사람은 같은 연구실에 있었다. 여자는 남자가 떠나면서 새로 충원된 대학원생과 그동안 미묘한 관계에 놓여있었고, 그것에 관해 그와 계속 상의해 오던 터였다.
“나쁜 놈..... 날 완전히 가지고 논거야. 분해....”
여자가 분통을 터트렸지만 남자는 대수롭지 않은 듯이 깨끗하게 발라먹은 뼈를 던지고 다시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야, 그렇다고 가지고 놀긴 뭘 가지고 노냐? 사귀기도 전에 누굴 좋아하던 그건 자기 맘이잖아. 무슨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닌데 어디서 지금 차인 사람 행세야? 조금 잘해준다고 잔뜩 기대에 부풀어서는 완전 가관이더라니..... 이 금사빠야.”
“너 지금 네가 추천한 후임이라고 그 자식 편드는 거야? 그래, 평소에도 아주 서로 죽이 잘 맞더구만. 그 자식 우리 랩에 집어넣고 빠져나갈 때부터 뭔가 꺼림칙했어. 그딴 새끼는 왜 데려 온 건데!”
“야, 말 좀 가리라니까. 사람이 참 바른 거 같달 땐 언제고 벌써 그 새끼냐. 이거 완전 오버야. 그리고 내가 빠져나가긴 뭘 빠져나가. 그건 교수님이랑 충분히 상의한 거고 이번 프로젝트를 위해서 어쩔 수 없었던 거잖아.”
남자는 맛있게 치킨을 먹으며 말했다.
남자가 연구실을 옮기기 전까지 두 사람은 공동연구를 진행 중이었고 그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기금을 얻어 새로운 연구팀이 조직되었다. 프로젝트 단장이던 담당교수는 연구실 간의 협업을 위해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새로운 팀에 합류하기를 원했고, 애초에 교수는 남자가 남길 바랬지만 그는 자청해서 팀을 옮겼다. 새 팀의 구성에서부터 관여했었던 남자는 연구원들의 면면을 잘 알고 있어서 그녀의 성향상 새로운 팀에 적응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을 거란 판단이 들어 교수를 설득했다. 그러나 그러한 내막에 대해 여자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혹시라도 자존심이 상할까 봐 남자는 교수에게 부탁해 비밀로 해두었던 것이다.
“몰라, 이 배신자. 넌 어쨌든 의리도 없이 친구도 버리고 도망간 나쁜 놈이야.”
그녀는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뭐래.... 그 얘긴 왜 자꾸 꺼내? 그리고 이왕 잘 된 거 그냥 기분 좋게 축하해 주고 말아. 그래도 니 동료잖아.”
남자는 그녀의 표정엔 아랑곳없이 열심히 치킨을 뜯어먹었다.
“계속 그 새끼 싸고돌래? 과동기라고 너 군대 갔다고 면회 가고, 복학했다고 챙겨준 게 누군데? 그동안 니 여자 친구들 소개시켜준 게 누군데? 도움을 주기는커녕 훈계질이야! 우리 우정이 이거밖에 안 돼? 그 자식 너 덕분에 우리 랩에 뒤늦게 들어와서 숟가락 얹었으면서 이럴 수가 있는 거야? 완전 배은망덕한 녀석이야. 괜찮은 놈인 줄 알았더니만 완전 일관성도 없는 놈.... 너도 그렇게 감싸는 거 아니다? 나 같았으면 그 자식 다리를 분질러버렸을 텐데. 의리 없는 새끼.... 잘도 쳐 먹네.”
여자가 맥주를 들이키고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러던가 말던가 열심히 치킨을 뜯어먹던 남자가 한심하다는 듯이 여자를 쳐다보았다.
“벌써 술주정이네. 야, 차라리 잘된 거야. 앞으로 몇 년을 같은 랩에서 생활할 건데 사귀다가 헤어지는 것보단 이게 훨씬 나아. 그렇게 금방 다른 여자에게 눈 돌릴 사람 같으면 아마 너랑 사귀었더라도, 내 장담하는데, 그리 오래가지 못했을걸.”
“이번엔 안 헤어지면 되잖아? 헤어질 걸 걱정하면 어떻게 연애를 하니?”
여자가 발끈했다. 남자가 살짝 그녀를 비웃었다.
“내가 널 모르냐. 네 모든 연애사를 쫙 꿰고 있는데. 니가 사귀어봤자 얼마나 가겠냐?”
“이....씨..... 가뜩이나 짜증 나는데 자꾸 이럴 거야?”
여자는 튀김옷이 묻은 입으로 질겅거리며 말하는 남자의 뒤통수를 갈겨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뚱한 표정으로 남아있던 맥주를 모두 비우고 여자도 큼지막한 치킨 조각을 집어 와작-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여자가 새 맥주병으로 손을 뻗자 이번엔 남자가 병뚜껑을 따고 주둥이를 깨끗이 닦아 여자 쪽으로 내밀었다. 여자가 입에 든 음식물을 삼키고 병을 들자 팅- 남자가 가볍게 병을 부딪쳐 주었다. 여자는 입 안 가득 맥주를 들이켜 길게 몇 모금을 삼켰다. 끄억- 가볍게 트림을 하고는 여자는 뭔가 개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픽- 그 모습을 보고 남자가 웃었다.
“왜 난 사귈 때마다 그 모양이었을까.... 근데 그게 내 잘못이야? 서로 좋아 죽다가 왜 그렇게 금방 시큰둥해지는 거지?”
여자가 탁자에 팔꿈치를 기대고 마치 남 이야기하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래서 내가 항상 말했잖아. 제발 좀 조신한 척 굴지 말라고.”
남자가 까칠한 투로 말을 뱉었다.
“왜? 그게 어때서? 좋아하면 잘 보이고 싶은 게 당연한 거 아냐? 남자들은 얌전한 여자 좋아하잖아. 다들 처음엔 그렇게 시작하는 거지. 넌 뭐 다르냐, 임마? 완전 웃긴 놈이야, 지도 참한여자 참한여자 입에 달면서....”
“넌 심하다니까.”
“심하다니?”
남자의 말에 여자가 몸을 굽히며 되물었다.
“가뜩이나 생긴 것도 이런데 얌전한 척 내숭을 떠니까 남자들이 환상을 가지는 거란 말이야.”
“환상이라니.... 그리고 내가 생긴 게 뭐 어때서?”
“이렇게 천상 요조숙녀처럼 생겼잖아. 완전 딱 속기 쉬운 얼굴이야.”
남자는 들고 있던 튀김 조각으로 여자의 얼굴을 두고 흔들어 대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이 생긴 모양이 네 가식적인 행동에 완벽히 들어맞으니까 그런 여자들에 대한 웃긴 환상을 가진 얘들만 너한테 달려드는 거라구. 너 이번 신소재 실험에서 이중활성점이 유도된 거 알지? 촉매제를 과하게 반응시켜서 그런 의도치 않은 결과가 나타났던 거지. 그러다 촉매제를 일시에 제거하면 어떻게 됐지? 네 행동이 딱 그짝이야. 네 실체를 깨닫게 되면 정이 확- 떨어져 버리는 거지.”
남자가 ‘확’이란 말에 강조할 때 여자는 순간 움찔했다. 남자는 그런 여자를 보며 심드렁한 얼굴로 입을 질겅거렸다. 잠시 말문이 막혀 얼음이 되었다가 감탄과 어이없음이 뒤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와..... 가식.... 와..... 이거..... 와..... 아무리 친구지만 너 팩폭 쩐다 쩔어.”
“너도 이제 좀 정신 차려야지. 언제까지 그렇게 가식 떨며 살래?”
여자는 탁자 모서리를 부여잡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걸 그냥 확! 대가리에 빵꾸를 내버릴까 보다.... ”
여자는 마침 눈에 든 빈병을 집어 탁자를 두드려댔다. 그녀의 모습에 남자는 웃음이 나와 하마터면 입안의 음식물이 튈 뻔 했다.
“크크.... 그래 그게 네 매력이다. 크흐흐...”
남자가 유쾌하게 웃었다. 웃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보니 여자는 갑자기 맥이 탁 풀려버렸다. 금방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신음이 자신도 모르게 샜다.
“아휴.... 널 정말 어떻게 해야 할까..... 너처럼 여자에게 막말하는 놈은 세상에 없을 거야.... 으흐흐....”
결국 여자도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이렇게 오랜 친구가 되기도 한 거지. 오늘만 해도 나 없었으면 누구랑 이런 이야기할 거야?”
“그건 인정. 이런 웬수같은 놈아.”
팅- 두 사람은 다시 병을 튕기고 사이좋게 맥주를 들이켰다.
“근데 걔 이쁘더라. 벌써 같이 셀카도 찍었더구만. 오늘 점심시간에 랩 식구들에게 은근 자랑하더라. 남자들도 모두 헤벌레 하더라니까. 치.... 교수님까지 한번 데려오라고... 그저 남자들이란.... 예쁜 여자 만나는 게 무슨 벼슬이냐? 유치해. 완전 얼굴값 하게 생겼더구만. 그 성질 맞춰 줄려면 고생 좀 해야 할 걸.”
그녀 목소리엔 이제 살짝 흥까지 올라 있었다.
“아닌데, 걔 완전 착한데. 똑똑하고 굉장히 예의도 발라. 요즘 정말 보기 드문 얘라구.”
남자는 지나가는 투로 말을 던졌지만 놀란 여자의 순간 동그래졌다.
“네.... 네가 그 얠...... 어떻게 아는데?”
말을 더듬으며 여자가 물었다. 남자는 여자의 눈을 조금도 피하지 않고 아주 또렷한 말투로 대답했다.
“내가 소개시켜 줬거든. 고등학교 동문회에서 알게 된 후배야. 진로문제로 이것저것 알려주다가 친해져서 연락하던 얘.”
“뭐? 네가 소개시켜 줬다고? 뻔히 나랑 썸타는 거 알면서 여자를 소개해? 지금 장난해!”
그때 여자는 어떤 직감이 피어올랐지만 흥분한 탓에 차분히 생각할 틈이 없었다.
“네가 걔랑 사귈까 봐. 넌 걔랑 정말 안 어울려.”
남자가 다시 또렷한 말투로 대답했다. 여자는 갑자기 술기운이 얼굴에 올라 순간 흥분한 상태가 되었다.
“왜 남의 앞길을 막아 이 미친놈아! 너 내 친구 맞아?”
“아니.”
남자의 한마디가 뎅- 하고 여자의 머리를 울렸다. 당황한 여자가 더듬거렸다.
“아니... 그게 무슨.....”
“이제 더 이상 친구 안 하려고.”
그때 남자의 표정은 그 이전까지 여자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것이었다. 그가 과연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친구가 맞는지 의심스러운 기분이 들 정도였다.
“나 이제 연구소도 옮겨서 예전처럼 널 볼 수도 없는데 그 시간을 딴 녀석에게 뺏기는 게 너무 싫어. 너도 쓸데없는 얘들 만나지 말고 그만 나한테 정착하자. 사실 난 꽤 오래전부터 널 여자로 생각해왔었어. 너무 갑작스럽겠지만 너도 지금부터 친구 말고 남자로 날 봐줬으면 좋겠어. 나도 꽤 괜찮은 남자라구.”
남자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중간중간 윗입술을 혓바닥으로 쓸어내리는 게 보였다. 그것은 남자가 정말 긴장했을 때 나오는 버릇이란 걸 여자는 잘 알고 있었다.
“이게 웬 날벼락이니.....”
여자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손에 잡힌 맥주를 들이켰다.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남자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금방 금방 네가 새 남자를 좋아해 버리니까 내게 기회가 있었어야지. 이번에 네가 남친이랑 헤어진 뒤로 기회 봐서 말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또 네가 그 녀석에게 정신이 팔려 있잖아. 그것도 내가 추천해 들어간 녀석한테! 그래서 어제 그 소개팅도 급하게 주선한 거야. 어떻게든 성사시키려고 정말 신중하게 상대를 고른 거라고. 그래야 너도 미련이 없을 거니까. 미안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남자가 말을 하는 동안, 여자는 처음 남자를 만났던 순간부터 함께했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났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너무 친한 척해서 불편했던 기억, 하지만 덕분에 남자들만 우글대는 공대에 쉽게 섞여 들었던 기억, 친한 친구를 소개시켜주고 잘돼서 기뻐했던 기억, 남자의 선배에게 반했을 때 도움받았던 기억, 군대면회갔다가 동상 걸린 얼굴을 보고 울었던 기억, 함께 대학원에 진학하기를 결심하고 연구실들을 기웃거렸던 기억, 그리고 최근 그가 옮겨가면서 뭔가 한없이 허전했었던 기억..... 그 기억들의 순간순간 남자의 온갖 표정과 행동들이 뒤섞이는 가운데 그의 얼굴이 점점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눈썹 하나하나, 낮 동안 자라 턱 위로 솟아오른 수염들 하나하나까지도 너무 또렷하게 보여서 신기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런 온갖 기억과 감정들 끝에 왜 그동안 자신은 남자를 이성으로 보지 않았을까란 의문이 들자 여자는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여자는 맥주를 조금 들이키고 그때까지 사용하지 않던 포크를 집어 작은 튀김 한 조각을 찍어 입에 넣었다.
“아이참... 갑자기 그런 말을 하면 나보고 어떡하라구.....”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콧소리를 내며 두 팔을 꼬았다.
“왜 갑자기 조신한 척이야. 나 지금 진지하다니까.”
남자의 말에 여자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야, 이 자식아. 일단은 모르겠고 오늘 치킨은 네가 사라.”
여자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남자의 눈을 쳐다보았다.
“언젠 내가 안 샀냐. 이 날강도야.”
여전히 심드렁하지만 그동안 발견하지 못했던 남자의 눈빛이 여자를 향해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