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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릭 Sep 29. 2018

그 애, 혹은 그녀

뭐랄까, 정리되지 못한 범주의 미확정이랄까, 아니면 중첩된 개념의 적용에 대한 현실적 부적응이랄까. 지금 남자가 겪고 있는 당혹스러움은 이러한 혼란으로부터 시작된 것임에 틀림없었다. 여태껏 알아 온대로 ‘그 애’라고 여겨야 할지, 그동안 전혀 생각지 못했던 한 이성으로서 ‘그녀’를 받아들여야 할지, 감정의 확인은커녕 그 대상에 대한 확정에서부터 남자는 난관에 봉착해 있었다. 문제는 그가 자신에게 찾아온 이러한 상황의 변화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그것을 처음부터 오류로 단정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착시그림을 바라볼 때 나타나는 인지적 변화의 모습과도 유사하다. 한 그림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이미지로의 전환이 간단히 이뤄지는 사람이 있는 반면, 설명을 듣고서도 좀처럼 쉽게 바뀌지 않는 사람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중간쯤의 어느 위치에 존재한다고 한다면, 그는 명백히 후자의 극단에 존재하는 경우라고 볼 수 있었다.


문제의 여자는 남자가 회장을 맡고 있는 ‘현상학회’라는 학술동아리 후배였다. ‘사회에 대한 현상학적 접근’이라는 다소 목적과 활동이 불분명해 보이는 문구를 모토로 삼고 있는 이 동아리에 그가 가입하게 된 건, 통계 모듈을 설계하고 로직을 다듬는 그의 흔치 않은 취미 때문이었다. “올바른 통계는 현상에 대한 세심한 관찰로부터 산출된다.”는 한 수학자의 말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남자는 이미 고등학생 시절 통계학 저널에 소논문을 게재한 경력까지 있었다. 그가 이 동아리를 알게 된 건, 처음 대학 기숙사에 입주하던 날이었다. 그날 갑자기 우체국에 들릴 일이 생기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우체국이 위치한 학생회관 건물 복도를 헤매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마 졸업할 때까지 이 동아리가 존재하는 지조차 몰랐을 것이다. 그날 복도 끝에 걸린 ‘현상학회’라는 글자가 새겨진 오래된 나무 푯말을 발견했을 때, 그는 마치 이국의 어느 항구에 서서 미지의 세계로 이어지는 바다를 마주하고 선 듯한 뭉클한 기분에 휩싸였었다.


사실 이런 남자의 가입 이유는 순전히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현상학회’는 유럽의 오랜 관념적 전통을 따른 인식론의 계보에 뿌리를 둔 이름이었다. 이는 남자가 감명을 받았던 수학자의 실증주의적 관점과는 단지 ‘현상’이라는 같은 단어를 공유했을 뿐, 서로 전혀 다른 목적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오해가 결과적으로는 남자에겐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단어에 대한 취지가 가리키는 방향에 대해 당시의 그로서는 알리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벌써 수년이 흘러 이제 마지막 학기만 남겨둔 지금의 그에게도 별반 달라진 점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좋게 말하면 순진한, 나쁘게 말하면 꽤나 고지식한 편이었다. 좀 더 거칠게 말하자면, 남자는 자신이 가진 생각 이외에는 멍청해 보일 정도로 무지하다고 할 수 있었다.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일 테지만, 당시 동아리에서 벌어지는 개념 논쟁이란 것도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의 말장난이 되기 쉬웠다. 그러한 논쟁을 즐기는 사람들은 대개 현학적인 말장난, 혹은 그것을 통한 경쟁심이나 과시욕 자체를 즐기는 법이었지만, 이 순진한 신입부원은 그런 인간적 본능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는 개념보다는 현상에서 드러나는, 그것도 수치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사실들만을 파고들었다. 그의 질문에 대해 선배들 중 어느 누구도 자신 있게 답변하기는 힘들었고, 이는 충분히 그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게다가 그가 가입하고 오래지 않아, 전통적 논점들에 관한 주요 원전을 줄줄 외며 세부적 차이점까지 논했던 탓에 그들로서는 쉽사리 남자를 무시할 수도 없었다. 


이쯤 되면 자칫 기존 부원들과 불화가 생겨날 법 하지만, 누구나 금방 그가 대화에 조금도 사심이나 감정을 싣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고, 혹시 난처한 경우가 생기더라도 그의 타고난 눈치 없음은 상대방이 얼버무리는 데에 편했다. 그래서 보통 그와의 논쟁은 적당히 그를 골려먹는 선에서 마무리되곤 했다. 다만, 이 동아리가 그때까지 근근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뭔가 지적인 주제를 논한다는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인데, 이러한 남자의 모습이 시들어져 가는 동아리 활동을 더욱 위축시킨 것은 분명했다. 더욱이, 한때 마치 지적인 교류의 장으로 여겨졌던 이 동아리는 이미 최근 입학하는 학생들에겐 완전히 시대에 뒤쳐져 고리타분하고 무익한 담소나 나누는 골방처럼 인식되어져 있었다.


현상학회는 남자가 군대 복무를 마칠 즈음에 이르러서는 신입부원 모집에서부터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가 복학한 다음 학기 중으로 정해져 있는 최소 충족 인원수를 채우지 못하면, 그때까지 간신히 받고 있던 육성회에서 나오는 지원금은커녕, 아주 학생회관에서 동아리 방을 비워야 할 지경이었다. 이는 부원들조차도 시대적 흐름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사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딱히 입후보할 부원도 없이 대충 회장직을 떠맡게 된 것이 남자였다. 아마도 다른 부원들의 눈에는 남자의 무심한 듯 맹한 태도가 자신들의 대학생활과 함께했던 동아리와 담담하게 작별하는 데 적당해 보였을 것이다. 그는 침몰하는 배에 남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마지막까지 뒤처리를 수행할 선장 역할로 적당한 사람이었다.


남자는 동아리의 존폐 문제나 회장 자리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아마 미래에 대한 약간의 희망이나 기존 활동에 애착을 가진 사람이 몇 명만 있었더라도 그가 회장이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딱히 동아리에 대한 애정이나 부원들 간의 친목에 관심이 없었던 남자가 복학하자마자 다시 동아리에 꾸준히 출입해왔던 건, 그냥 동아리가 있고 자신이 그 소속이라는 이유뿐이었다. 그는 이런저런 이유를 따지기보다는 일단 일이 주어지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냥 하는 타입이었다. 본의와 상관없이 회장이 되었지만, 문 닫을 날만 기다리는 동아리에 특별한 목표나 의욕이 있을 리도 없어서, 남자는 그냥 자신의 가진 취미를 적극 동아리 활동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보통이라면 이런 새로운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는 반발심이 작용하기 마련이었겠지만, 그저 관성에 의해 운영되던 동아리의 분위기는 남자가 하고 싶은 것을 실행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남자는 우선 학생들 사이에 크게 이슈가 되는 사안에 관해 학생 게시판을 통해 설문을 받고 이를 토대로 가능한 명제들을 도출해 냈다. 이 도출된 명제들 중에서, 매주 선정된 주제에 관해 진행해왔던 무작위적인 토론회 대신, 이슈를 표현해낼 수 있는 핵심적인 명제를 선정하는 데 힘썼다. 정기적인 모임에서는 이 선정된 명제들을 중심으로 이슈가 생겨나게 된 배경과 원인들에 관한 요소들을 정리하고 그 상관관계를 함수에 관한 수식과 도표로 작성했다. 대부분의 자료수집과 정리는 남자와 또 한 명의 형식적 직책인 간사가 준비해 두었기 때문에 나머지 부원은 별 부담 없이 참석해 자료를 검토하고 의견을 제시하면 되었다. 그런대로 자기주장을 피력하는 만족감이 있어서 꾸준히 참석하는 부원도 있었다. 이렇게 구성된 논리적 연관성을 토대로 무작위로 입력되는 질문과 답변을 표본으로 수치화할 수 있는 모듈을 만들고, 다시 이를 웹에서 작동할 수 있는 스크립트로 추가해 코딩한 다음, 마지막으로 다시 게시판으로 올려 접속자들이 참여하고 결과를 확인할 수 있게 했다.


남자의 이런 활동은 뜻밖에 주목을 받았다. 분명 설문이 작동되는 논리와 수학적 함수, 그것을 구현해내는 프로그래밍이 토대가 된 것은 분명하지만, 학생들에게 직접적으로 관심을 불러일으킨 지점은 어떤 통계적 결과에 관해서도 극단적인 대립이 나타나지 않도록, 매끄럽게 설명을 해내면서도 재치 있는 표현으로 재미를 더하는 이슈 분석 결과였다. 이는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도 찬반에 관계없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어서 가벼운 대화 주제로 적당했다. 이 설문 형식의 통계 페이지는 알음알음 점점 많은 학생들의 인기를 얻고 참여가 이뤄지면서, 두 학기가 지날 때쯤에는, 학생들 사이에 이슈가 되는 사안마다 반드시 언급되는 일종의 권위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처음엔 단순히 재미난 시도였던 것이 호응을 얻으면서 타 동아리와 협업을 한다든지, 교내 공식 행사에 참여하는 등 점점 동아리의 공식 활동으로 인식되어갔다. 이는 자연스레 동아리에 대한 홍보나 이미지 개선으로 이어졌고, 당장 올해부터 이례적으로 일곱 명이나 신입부원을 충원할 수 있었다. 이로서 동아리는 당분간 폐부의 위기에서 자유롭게 되었고 이제 남자에게는 새로운 회장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일만 남아있었다.


동아리는 관례에 따르자면 3학년 중에서 회장을 뽑게 되어있었다. 하지만 3학년이 되는 세 명 중, 두 명은 교환학생으로 해외로 나가버렸고, 한 명은 집안 사정으로 휴학을 해버린 데다 남자와 같이 4학년이 되는 부원들은 모두 취직을 위해 여기저기 면접을 다니느라 동아리 운영은 뒷전일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없이 2학년 중에서 뽑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선출 당일이 되자 정작 관심도 없었던 4학년들이 참석해 이를 극구 반대했다. 회장은 당연직으로 동아리 협의회 간사를 겸하게 되어 있는데, 만약 2학년이 회장이 된다면 다른 동아리들로부터 웃음거리가 될 거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죽어가던 동아리의 생존이 분명해지자 더불어 전통이라든가 체면치레도 함께 되살아났던 것이다. 이런 연장자 그룹에서 흔히 나타나는 반론에 대해 나머지 부원들도 팽팽히 맞섰다.


이에 관해, 나름 동아리를 위기에서 구한 현직 회장으로서 남자가 어느 한쪽의 의견에 힘을 실어줄 수도 있었지만 그는 끝까지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그로서는 순탄하게 후임자를 선발하여 물려준 뒤 그동안 동아리 활동으로 소홀했던 공부를 위한 계획에만 관심이 있었다. 회의 막바지까지 의견이 좁혀지지 않자 누군가 이럴 거면 차라리 일 년 담임 규정을 없애고 회장을 연임시키는 게 낫겠다는 푸념을 했다. 이 별생각 없이 내뱉은 말 한마디에 엉뚱하게도 전혀 계획에 없었던 남자가 다시 연임하는 걸로 갑자기 의견이 몰렸다. 그는 일찌감치 대학원 진학 쪽으로 진로가 정해져 있었던 탓에 다른 졸업예정자들에 비해 부담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지만, 사실은 논의가 이어질수록 회장이 바뀌면 부흥의 조짐을 보이는 동아리 활동이 다시 위축될지 모른다는 공감대가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예기치 못한 결정이긴 했지만 역시나 마땅히 마다할 이유를 찾지 못했던 그는 결정에 따르기로 했다. 이것이 작년에 이어 올해도 남자가 회장을 맡게 된 이유였다.


뭐, 여기까진 딱히 문제가 없었다. 동아리의 활동 프로세스는 지난 일 년을 통해 이미 틀이 잡혔고, 지난 활동의 결과물에 대해선 처음부터 꼼꼼히 기록을 남겨둬서 매뉴얼로 삼기에 손색이 없었다. 신입생들 모두가 이미 활동 내용에 관해 잘 알고 입부를 신청한 데다가, 여기에 심층면접을 거치면서 목적의식이 분명한 학생들로만 구성되었기 때문에, 몇 개월 정도만 참여하면 노하우를 익히는 것에도 어려움이 없었다. 그렇게 예상대로 흘러가던 와중에 그에게 사소해 보였던 문제가 최근 갑자기 심각하게 불거졌던 것이다. 이 문제는 오직 동아리의 간사인 여자 후배에 관한 것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후배가 문제라기보다는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이 문제의 후배로 말하자면 바로 이 ‘현상학회’의 새로운 부흥을 일으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또 다른 주역이라 할 수 있었다. 남자가 기획한 설문 페이지에서 결과로 나타나는 해설문을 작성해 왔던 것이 바로 여자였다. 간결한 상황 정리와 재치 있고 유려한 문체로 무게중심을 제대로 잡아낸 여자의 글이 없었더라면, 남자의 논리적 설계와 기술적 구현은 어쩌면 아무런 관심도 얻지 못한 누군가의 시답지 않은 발상에 머물렀을지 모른다. 하지만 말했듯이 남자는 고지식해서 그런 여자의 역할에 대해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로서는 그녀의 표현들이 간결하지 못하고 의도적으로 사실을 조금 비켜선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보통 진실이란 것은 생각처럼 아름답지도 편안하지도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사실에 대해 그는 무관심했다. 단지 논리 정연하고 간결하다는 것 자체에 희열을 느끼는 남자 같은 특이한 부류가 아니라면, 진실이란 대개 개인적 취향에 따라 쓸모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는 여자의 역할뿐 아니라 근래 동아리의 활동 자체가 주목을 받는 것 자체에 대해서도 별 관심이 없었다. 그냥 회장으로서 자신의 관심을 반영했을 뿐이었고, 그냥 좀 아는 체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갑자기 신입부원이 늘어서 신경 쓸 부분이 늘었다는 정도였다.


여자는 남자가 회장을 맡았던 그 해에 동아리에 가입한 유일한 부원이었다. 말로만 응원하는 기존 부원들 사이에서 여자는 사실상 그의 유일한 조력자였다. 그녀는 가입한 첫 학기 중반부터 동아리의 모든 사안을 논의하는 총무의 역할까지 성실히 수행해 내고 있었고, 그다음 학기에는 정식으로 간사를 맡았다. 애매한 군 복무 기간 때문에 3년을 휴학한 남자가 회장을 맡았을 때 신입생이었던 여자와는 무려 7살이나 차이가 났다. 그때 미처 여고생 티를 벗지 못한 여자의 첫인상은 그 후로도 그대로 그의 뇌리에 박혀있어서, 여자의 성실한 조력에 대해 그는 언제나 동생을 바라보는 일종의 대견함 비슷한 심정을 지니고 있었다. 실제로도 여자는 남자의 여동생보다도 5살이나 어렸다.


남자가 여자에 관해 겪는 문제는 그가 모르는 사이 꽤 오랜 시간을 두고 진행된 것이었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여자를 볼 때마다 남자는 뭔가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불쑥불쑥, 여자와의 지난 사소한 기억들이 되살아나 멍하게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 늘어갔는데, 그녀와 마주하게 되면 그동안 알고 있던 모습과 새롭게 의식되는 감정 사이에 애매하게 놓이는 경우가 늘었다. 남자는 여자를 대해왔던 일상적인 관계에 대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앞으로 어떤 식으로 대해야 할지가 걱정스러워졌고, 그런 걱정은 다시 혼란을 부추겨서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늘 여자를 마주치게 되면 어떡할지에 대한 불안에 시달렸다.


아마도 그 시발점은 갑자기 신입부원이 늘어나 동아리방이 활기에 넘치게 된 시점부터였을 것이다. 신입생들에게선 대학에서의 새로운 경험들로 매일매일 대화와 그로 인한 생기가 넘쳐났다. 그런 수다스럽고 시끄런 활력은 남자가 신입부원이었을 때도 그 이후의 신입부원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다. 사실 논쟁이 불붙은 토론시간을 제외하곤 동아리방 분위기는 늘 차분하고 고즈넉해서, 보기에 따라선 무기력하고 칙칙해 보인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여자 역시 밝은 성격이긴 하지만, 워낙 매사에 똑 부러지는 성격인 탓에 어수선함이라곤 느낄 수 없어서, 남자는 당분간 이 새로운 풍경에 익숙해지고 정돈되기까지 신경 쓰이는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난해 노력의 결과로 일어난 현상인지라 조금 흐뭇한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이 새내기들에게 아마 여자만큼 바람직한 선배는 찾기 힘들었을 것이다. 여자는 수강이나 장학금, 학사정보들, 각 과들과 관련된 전통들 외에도 오래전부터 선호해오던 주점이나 카페의 위치나 식당의 메뉴들, 알바정보, 이것들과 관련된 각종 팁들에 관한 정보의 보고라고 할 수 있었다. 여자가 신입부원들에게 차분히 설명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종종 남자도 잘못 알고 있거나 전혀 모르고 있던 사실들을 접하고서 놀랄 정도였다. 남자의 주변머리로는 여자와 함께 밥을 먹었던 곳이 입맛에 맞았다거나 작년에 동아리방에 새로운 컴퓨터를 지원받을 수 있었던 이유같은 것들에 대해 전혀 생각해 볼 수도 없었을 것이다. 신입생들의 고민이나 질문을 받아주고 이런저런 설명과 충고를 덧붙이는 그녀의 모습은 그들과 고작 일 년의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성숙함을 돋보이게 했다. 늘 두 사람이 붙어 자료를 수집하고 모델을 설계하고 코딩을 하면서, 늘 가르쳐주고 지시하던 데에만 익숙했던 남자에게 이러한 분위기는 그녀에 관한 전혀 색다른 시각을 열어주었다.


여자에 대한 신입생들의 태도 역시 남자의 시각을 변화시키는 주요한 요소였다. 필요한 말만 하는 데다가 진행하는 작업에 관해서만 열정적인 남자보다는 대학생활 전반에 관해 정말 유용한 것들을 알려주는 여자가 신입생들과 훨씬 영향력 있는 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두 사람의 나이나 학번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신입부원들은 남자와 여자를 한 묶음의 선배로 다뤄졌다. 게다가 동아리의 실질적인 운영에 관해서는 전적으로 간사인 여자의 결정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심정적으로 그 무게감은 오히려 여자 쪽에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여기에 이 활기찬 신입부원들 역시도 남자의 고지식하고 맹한 면모를 모를 리가 없어서, 장난이긴 했지만 이 허술한 회장은 곧 그들로부터 구박당하는 처지가 되어갔다. 그러나 여기까지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동생이나 조카쯤으로 여겼던 여자가 자신과 같은 위상을 가지게 된 분위기 속에서, 남자가 여자를 마냥 애처럼 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특히나 신입부원들 중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여자 두 명의 잔소리가 심했다. 간사에게 너무 잡다한 일을 맡긴다는 둥, 비서처럼 막 부려먹는 것 아니냐는 둥, 좀 신경을 써야 하는 거 아니냐는 타박이 늘었고, 나머지 부원들도 동조해 이런 분위기를 몰아가는 데 재미를 붙였다. 남자가 아무리 눈치가 없었다고는 해도, 이런 상황에서는 당연히 여자에 대한 말과 행동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고, 신기하게도 이런 태도변화는 여자에 대한 그의 심경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신경이 쓰이는 그만큼 남자는 여자에게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면들을 발견했다.


단순히 고분고분하다고만 생각했던 것이 실은 사려 깊은 배려였다든지, 가끔씩 철 모르는 치기라고 여겨왔던 행동 속에 의외의 상황 판단력을 발견하게 되었다든지, 가끔씩 나눠먹었던 도시락이 모두 직접 해온 요리였다던 지, 그동안 전혀 몰랐던 면들에 대해 알게 되면서 남자는 자신의 무지함이 놀라울 정도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라는 존재 자체가 불쑥불쑥 그의 감각을 자극했다. 자꾸만 눈을 끄는 여성적인 굴곡들. 오밀조밀한 이목구미의 형태들, 보면 볼수록 풍부한 표정들, 그녀에게서 풍겨지는 이런 여성스러움이 느껴질 때마다 그는 굉장히 당황했다. 안타깝게도 그것들은 이성적 호감으로 발전하기보다는 남자에게 뭔가 죄를 지은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그럴 때마다 남자는 도망치듯 눈길을 피해 난데없이 콩닥거리는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


이러한 심경변화는 최근 급속도로 진행되어서, 지난 며칠 동안 남자는 온종일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일이었다. 이를테면 남자는 그 흔한 짝사랑을 해본 적도 없는, 한때 신조어로 유행했던 ‘초식남’의 전형이라 할 수 있었다. 갑자기 눈을 뜬 이성에 대한 본능을 그로서는 어떻게 다뤄야 할지를 몰랐다. 어쩌다 보니 초등학교를 제외하곤 남자학교만 전전하다 공대로 진학해온 탓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이것은 남자가 이성적 호기심에 대해선 지진아에 가까울 정도로 발달이 늦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보통 이런 부류는 처음 사귀는 쪽이 꽤나 인류애를 발휘해야 하는 고충을 겪게 마련이지만 남자는 이런 경험조차 가지지 못했을 만큼 둔감했던 것이다. 여하튼 이런 상황이 남자에게 미치는 여파가 어느 정도였냐면, 강의 중에 교수의 말이 중간중간 사라져 버리는 탓에 도무지 내용을 맥락을 이어가기가 힘들었고, 책을 읽을 때는 한 문단을 넘기면 끝 단어를 제외하곤 깡그리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래서 남자는 쉬는 시간이면 늘 시간을 보내던 도서관 대신 정처 없이 교내를 떠도는 시간이 부쩍 늘어났다. 그러던 어느 날도 그는 어느 한적한 벤치에 앉아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분명 얼마 전까지 그녀는, 아니 그 애는 나의 가장 친하고 편안한 후배였어. 그런데 언제부터였던 걸까,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며 그 생글거리던 두 눈이 아주 깊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이었을까.... 아니면 가지런히 컵을 모으고 있던 하얀 두 손이 참 가지런하다고 느껴졌던 그 순간이었을까.... 아니면 햇살 가득한 벤치에 나란히 앉아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리던 옆얼굴을 바라보았던 그 순간? 가만가만.... 술자리에서 나온 부모님 이혼 이야기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다 갑자기 눈물을 쏟아냈던 당혹스런 그 순간이었을까..... 글쎄.... 어느 것도 분명치 않아. 여기에 얼마든지 다른 기억들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기억에 대한 판단이란 대개 실제와 상관없이 현재 감정의 자의적 해석에 의해 확정되기 마련이지. 결국 이런 생각은 다 부질없는 짓이야. 여하튼 지금 중요한 건, 이런 온갖 생각들로 하루하루가 엉망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야.’


온통 그 애랄지 그녀랄지, 남자는 자신이 잘 알면서도 또한 전혀 알지 못하는 어떤 존재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에 당장 필요한 생각들이 자리할 공간이 남아나질 않았다. 그때는 이미 동아리방을 찾아가는 일부터 남자에겐 쉽지 않은 일과가 되어있었다. 여자를 만나기 전에는 만나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에, 만나서는 기껏 생각해두었던 것들은 아무런 소용도 없는 혼란스러움에, 만나고 난 후엔 도대체 무슨 바보 같은 말을 떠들었는지에 대해, 무엇보다 그녀의 모습과 행동들에 대한 아주 세세한 부분들이 떠올라 맥락 없이 자꾸만 되풀이되는 것에서 도무지 헤어나질 못했다. 그는 급기야 이대로 미쳐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남자는 이러한 문제가 그가 여자를 동생이 아닌 한 여성으로 보기 시작한데서 생겨난 거라고 나름대로 정확한 판단을 내렸다. 그래도 여기까진 자연스럽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말했듯이 정말 우스꽝스럽게도, 이런 문제의식은 여자에 대해 느끼는 이성적 감각이 그의 사고에 박혀있는 동생이라는 고지식한 이미지에 어긋난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착시그림에서 새로운 이미지의 존재를 감지하고도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일종의 오류라고 단정했던 것이다.


인식론적인 관점에서 이 상황은 갑자기 그에게 닥친 대상에 대한 개념의 미결정, 혹은 그 망설임이 뒤따르는 판단을 위한 정보를 자신의 고정된 관념에 맞춰보고는 감히 해석할 염두를 못 내고서 불확실성을 동반한 의문 내지는 머뭇거림의 벼랑 아래로 모조리 밀어 넣고 있는 형국이었다. 여기에 수학적인 해석을 덧붙이자면 여자에 대한 스스로의 입장을 동생과 이성이라는 두 가지 경우의 수를 무한히 확장하는 연속 확률 속에 집어넣고는 그 기댓값을 부정하며 완전히 넋이 나가버린 꼴이라 할 수 있었다. 이것은 마치 전혀 알지 못하는 어느 방문 앞에 서서 커다란 열쇠 꾸러미를 순서도 없이 하나씩 찔러 넣으면서 다른 한 손에 들린 그 방의 열쇠는 전혀 바라보지 못하는 어느 상황극에나 나올법한 딱한 장면에 비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방문 뒤의 그녀는 그가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세상의 존재였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좀 더 깊게 파고들기로 했다. 


남자는 자신의 불안정해진 사고에 대해 논리적 회귀분석을 적용했다. 그는 논리회로에서 처리되지 못한 어떤 데이터 값이 누적되면서 일종의 간섭을 일으키고 있을 것이라는 가정을 세우고 그러한 데이터를 검증할 조건문을 하나둘씩 만들어 나갔다. 그는 며칠 동안 제때 식사하는 것도 잊은 채로 가능한 명제들을 작성하고 그것들을 적용해내기 위한 모듈을 구성했다. 남자는 이 새로운 모듈을 구현하는데 모든 생각을 집중했다. 그러는 동안 그는 완전히 자신의 감정에서 벗어나 그것들에 대한 관찰자의 입장에 서있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놀랍게도 어느새 그는 자신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던 여자에 대한 복잡한 감정들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 남자는 의식적으로 이 생각에 몰두했다. 물론 이 방향은 엉뚱했지만 그는 자신의 생각을 정교하게 다듬어갔다.


그는 자신이 설계한 모듈이 어떤 직관적인 표현 체계로 작동하길 원했다. 이를테면 길을 건너야 할지 멈춰야 할지, 또 얼마나 시간이 남았는지를 알려주는 건널목의 신호등 같은 간단명료함이 그가 구상한 것이었다. 그녀에 관한 애매모호한 정보들이란 그에게 익숙하지 않았고 불편했으며, 그것은 처음부터 명료함과는 거리가 먼 골치 덩어리 같은 존재로 인식되어졌다. 그의 이러한 시도는 순전히 개인적인 혼란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그는 단순히 자신과 여자를 고정 변수로 두는 논리식이 아니라 모든 개인과 개인을 다룰 수 있는 범용 함수로 그 틀을 확장시켜 나갔다. 논리적 기계란 관점에서 인간을 유한한 명제들의 집합으로 다룬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게다가 한 개인에게서조차 상호 모순되는 명제가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검증하면 할수록 자연스레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결국 대략적인 과제는 한 사람이 또 다른 누군가의 관계에서 오는 불안도를 수치화하고 그것을 분석하는 것으로 확정 지어졌다. 누군가에 대해 평소와 다르게 어떤 이상적인 징후를 감지했을 때, 그 관계와 자신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지표로 삼을 수 있도록, 이를테면, 제시된 문항들을 체크하여 그와 거리를 둬야 할지, 좀 더 친밀함을 보일지, 우호적인지 적대적인지를 그래프를 통해 상관관계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는 단순히 특정한 사안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불특정 개인과 또 다른 불특정 개인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에 좀 더  광범위한 선택지의 구성이 필요했다. 여기에 남자는 그동안 틈틈이 공부하고 있었던 인공지능 모듈을 추가하여 실제 사용하는 단어의 빈도에 따른 판단까지 고려하도록 했다.


그가 세운 가설에 따라 설계된 모듈의 적합성을 검증하고 조건값을 조정하기 위해 남자는 스스로를 테스트 자료로 활용했다. 우선 새로운 신입생들에 대한 자신의 행동 방침을 정해 보기로 했는데 대충 이런 식이었다. 대화 중에 자신이 사용하는 단어들의 조합을 입력하고 그것에 관해 상대방이 보이는 반응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긍정적과 부정적 단계를 각각 5단계로 나눠서 입력값을 만들었다. 자신의 태도든 상대방의 태도든 그것에 대한 판단은 결국 주관적일 수밖에 없음으로, 이를 보완하기 위해 상대방에 대해서도 동일한 기준으로 입력하고 이에 대한 자신의 반응 값을 측정해 교차검증이 이뤄지도록 했다. 대략적인 구성이 이뤄지자, 남자는 그것을 실제로 가장 잔소리가 많았던 신입부원 두 명에게 적용해 보았다. 그날그날 나눴던 대화들 중에 인상에 남은 것 중에서 단어를 선정해 매일 체크하고, 이를 바탕으로 흔히 예상할 수 있는 평범한 대화를 가정해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이중 가장 적합한 경우를 선택해 다음날 실행하는 일을 반복하는 식이었다.


어떤 방침을 사용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생각보다 수많은 가정을 할 필요 없이 간단한 몇 개의 대화를 시뮬레이션하는 과정에서 수치화된 그래프를 통해 직관적으로 선택할 수 있었다. 대화의 내용이란 무한한 경우의 수임으로 가정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지만 그 대화를 참여하는 사람의 태도는 좋고 나쁨이라는 단일한 기준으로 측정할 수 있다는 가설이 세워졌다. 측정값에 따라 가능한 모든 대화에 미리 설정해둔 방향을 유도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인공지능은 성별과 나이, 직업에 따라 사용하는 언어적 통계와 그 경향 분석에 특화해서 미리 값을 설정해둔 단계별로 선택한 적절한 예문을 제공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했다. 일주일 동안 테스트한 뒤, 남자는 자신의 가설에 부합하는 유의미한 결과를 확인했다. 그들의 잔소리가 확실히 줄었고 태도가 훨씬 부드러워짐이 체감되었다. 이는 인공지능이 보여주었던 시뮬레이션 결과와도 일치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남자는 여자에게 적용했다.


남자가 정한 방침은 분명했다. 여자로부터 받아들이는 통제되지 않는 애매모호한 정보들이 누적되는 것을 막을 것. 이 정보들을 분석해내는 원래의 계획이 수정된 것은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과정에서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의식은 자신에게 노출되는 정보 모든 것을 분석해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취사선택한 정보들에 의식을 집중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었고,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 정보는 분석이 목표가 아니라 제때에 적절히 털어내는 것이 올바른 방향임이 분명해 보였다. 따라서 여자와의 대면에서 필요한 방침은 쓸데없이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 것이어야 했다. 이를테면 분명히 공유되는 정보가 발생하지 않는 한 애써 대화를 이어가려 않는다던지, 그녀의 요청에 대해 최선을 다하되 자신의 일정을 넘어서서 무리하지 않는다던지, 대화 중 생각 없이 불필요하게 시선을 맞추지 않는다던지 하는 것 등이었다. 방침을 정해두자 확실히 남자의 마음에는 전에 없는 여유가 생겨났다. 그러자 그동안 왜 자신이 그녀 앞에서 안절부절못했던 건지 우습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여유로워진 마음과는 달리 결과는 좀 석연치 않았다. 분명 여자와의 대화는 어느 정도 정돈되어져서 뭔가 해석의 여지가 열린 부분들이 사라졌고, 그로서는 정체를 알 수 없었던 긴장감을 유발하는 경우가 줄어들어 더 이상 불안감에 시달릴 필요가 없어졌지만, 이전의 적용결과를 통해 예상했던 결과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그녀로부터 받아들이는 불필요한 정보만 사라지면 예전과 같이 동생이라는 관계가 강화될 거라는 기대와 달리, 그때까지 작동하고 있던 동생으로서의 관계마저 함께 불분명해졌다. 분명히 동아리에서 역할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해지고, 여전히 간사로서 훨씬 안정적인 조력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기분 나쁜 구석이 있었다. 이해할 수 없었던 건, 그가 택한 방침의 방향과 일치하는 지표가 늘수록 여자는 점점 더 알 수 없는 존재가 되어갔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애써 이점을 무시하고 있었다. 잘 모르는 큰 문제는 잘 아는 작은 문제보다 훨씬 사소해 보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남자는 불안감이 사라져 버린 자리를 대신 공허함으로 채우고 있었다.


어쩌면 이때 남자가 상실감에 깊숙이 빠져들지 않았던 것은 여전히 그가 세운 가설에 대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동안 온통 이 문제에 정신이 팔려있었던 관성 탓인지, 약간은 자신이 만든 모형에 맹신하는 경향도 있었고, 일종의 회피 본능이랄지 약간은 그 기분 나쁜 직감과 마주하지 않으려 무의식적으로 도망치려던 이유도 있었던 것 같다. 자신을 괴롭히던 불안이 사라져 버린 뒤에 남은 이 꺼림칙한 뒷맛의 정체가 외로움이란 걸 당시의 그로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 개운하지 않은 씁쓸함 대신, 남자에게는 그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정체모를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성과였다. 만약 이때 몰두하고 있었던 과제가 없었다면 이전에 느꼈던 불안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상실감에 시달렸을 거란 걸 남자가 짐작하지 못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사람이 뭔가에 몰두하려는 것은 다른 상실감이나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아주 흔한 이유다.


정해둔 방침에 의해 여자와 새롭게 형성된 관계가 고착되어갈 때쯤, 남자는 다시 예전의 일상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연인 되기 전에 계획했던 대로 학과 수업과 대학원 진학을 위한 준비에 적절히 시간을 배분하기 위해, 그는 그동안 개인적으로 다듬어 오던 과제를 이제 그만 동아리 활동으로 넘기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계속 검증해나가기엔 개인적으로 이미 한계에 부딪혀 있기도 했다. 동아리에서 구체적으로 작업을 하기 전에는 먼저 주제를 발표하고 논의를 거쳐 확정된 것을 함께 토론하면서 설계할 방향을 잡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이번 경우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어서 단독으로 세미나를 준비했다. 기존의 과제에 비해 다뤄야 할 내용이 방대했지만, 대신 이미 주요한 부분들은 모두 완성되어 있었고, 스스로 실행해 검증한 사례도 있었으므로 큰 부담은 없었다. 그로서는 부원들 모두와 좀 더 다양한 관점에서 분석할 수 있으리란 기대와 함께, 이것을 자신이 주도하는 동아리 활동의 마지막 결과물로 남겨두고 싶었다.


그는 적당한 날을 골라 그동안 자신이 구상하고 만들었던 것들에 대해 부원들에게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어떤 이슈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불특정 개인 간의 행동 모형을 다루고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 해왔던 작업과의 차이점과 참고를 한 자료들에 대한 사전 설명에 중점을 뒀다. 각종 게임이론들, 그중 실제 모형으로 삼았던 모델들의 특징과 적용 과정에서의 주의점 등을 설명하는 동안, 부원들도 모두 그의 발표에 집중했다. 활발한 질문과 답변들이 오가는 가운데, 여자 역시 흥미로운 표정으로 열심히 남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모든 것이 남자가 계획한 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어 가는 듯했다.


그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한 건, 발표 막바지에 남자가 그동안 세운 가설과 그에 따른 결과물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그것들은 남자와 여자의 말과 행동, 서로 간의 반응과 추측을 토대로 작성된 모형이었다. 물론 구체적인 내용은 모두 제거하였고 개인적인 특성이 드러나는 분석은 다른 표현으로 대체했다. 그러나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자는 아주 분명하게 알아챘다. 이 부분은 남자로서도 어쩔 수 없는 것이긴 했다. 좀 더 변화를 준 사례를 떠올리기에 그의 이성에 관한 경험은 너무도 부족했던 것이다. 사례로 구성한 두 인물 사이에 일어나는 일들, 그러니까 순서도 상에 나타나는 각종 오브젝트와 컴포넌트들의 배열은 여자가 보기에 두 말할 나위 없이 자신과 남자의 지난 몇 달간의 관계를 나타내고 있었다.


더욱이, 남자는 그녀가 그동안 그의 성실한 조수이자 그 복잡한 결과물을 해석해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낸 뛰어난 관찰자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어쩌면 한참 어린 후배에다 고분고분 말 잘 듣는 동생이라는 고정된 이미지에 가려 여자를 얕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설명이 진행될수록 여자의 얼굴이 굳고 입술이 닫혔지만 남자는 설명이 끝날 때까지 조금도 눈치 채지 못했다. 프레젠테이션이 끝나고도, 부원들은 이 새롭고도 특이한 과제에 대해 질문을 하며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때까지도 남자는 부원들에게 신나서 자신의 결과물을 설명하고 있었다.


“전부 잠깐 나가줄래?”


이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여자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직하지만 분명한 여자의 목소리가 분주한 대화들 사이를 압도하듯 잘라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눈빛들이 여자에게 모아졌지만, 그 순간 느껴지는 중압감에 감히 누구도 질문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껏 그런 모습을 보인적은 없었지만, 대충 짐작되어졌던 그녀의 본모습을 후배 부원들은 단번에 알아차렸다. 전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멀뚱한 표정의 남자뿐이었다. 뚫어져라 남자를 쳐다보는 여자의 시선에 남자가 어버버 하는 사이, 부원들은 서로 눈짓을 보내며 조용히 동아리방을 나섰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네요. 그러니까 지금껏 저따위를 한답시고 의도적으로 날 이용했다는 거죠? 선배 이런 사람이었어요? 이런 식으로 아무렇지 않게 사람 막 이용하고 그래요? 제가 선배가 원하는 만큼 두고 보는 그런 물건이에요?”


남자는 뭔가 크게 잘못되어간다는 사실에 몸이 죄어드는 기분이 들었다. 뭐라도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도무지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그저 좋은 동생이었던 사람이 뭔가 굉장히 혼란스러운 사람이 되었다가, 다시 전혀 알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가, 이제는 감히 대꾸를 못할 만큼 두려운 사람이 되어 눈앞에 서 있었다.


“제가 저런 수치로 집어넣어도 되는 그런 표본인 거에요? 그리고 저건 대체 뭐죠? 내가 왜 선배 동생이에요? 그깟 나이 좀 많다고 왜 내가 선배가 규정하는 틀 속에 있어야 하죠? 세상 공평하다는 듯이 모든 일을 평가하고 분석하면서 왜 선배는 자기 멋대로 날 평가하고 그렇게 일방적으로 대하는 거죠? 이게 정말 공평한 거에요? 여기서 저만큼 같이 시간을 보내고 가깝게 지낸 사람도 없을 텐데, 이런 식으로 제게도 일방적이라면 대체 뭘 제대로 바라볼 수 있다는 거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에요?”


그때 남자는 뒤통수를 한방 맞았다는 표현이 뭔지를 실감했다. 그는 여자의 눈을 감히 피하지도 못한 채 마주 보면서 어떤 진실 하나를 깨달았다. 현상을 ‘이해’하는 것과 현상을 ‘경험’하는 것은 전혀 다른 작동원리를 지닌다는 것을. 전자는 단지 사건의 경향성을 파악하는 것이었지만 후자는 사건에 대한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것은 확률적 통계가 아니라 좋고 나쁨 그 자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삶의 형식 자체를 뜻했다. 그러기 위해선 자신에 대해 충분히 알아야 했다. 이는 논리나 추론이 아니라 솔직함의 문제였다. 결과적으로 감정의 좋고 나쁨에 따라 합리적 선택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자신의 가설은 완전히 잘못이었다. 실패를 깨달은 그 순간 신기하게도 남자는 불확실함으로부터 다가오는 새로운 종류의 진실을 직감했다. 그것은 마치 오래전 대학에서의 첫날 바로 이곳에 걸린 현상학회라는 간판을 바라보며 느꼈던 감정과 비슷했다. 어렴풋한 미지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져있는 듯한 희열. 그러나 그런 감동도 잠시, 남자는 그 광경을 지켜볼 수만 있을 뿐, 어떻게 그 세계로 다가서야 할지 알지 못했다. 남자가 아무런 말이 없자 여자는 소지품을 챙겨 입구로 향했다. 문 앞에서 손잡이를 잡아당기려다 말고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선배는 바보야. 선배는 날 좋아하는 거라구. 이 동아리에서 선배 빼곤 다 알아요. 아.... 억울해. 내가 이런 멍청한 사람을 좋아했다니.....”


여자가 사라지자 남자는 얼이 빠진 채로 의자에 주저 않았다. 그는 현 상황을 정리해보려 애썼지만 머릿속은 솜뭉치처럼 두리 뭉실하게 이리저리 흩어져 구체적인 생각으로 나아가질 못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부원들이 하나둘 슬금슬금 자리로 돌아와 남자의 표정을 살폈다. 뭐라 자기들끼리 수다를 떨었지만 남자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답답한 공기가 그의 가슴속을 가득 채웠다. 


"위잉~" 


휴대폰 진동음이 탁자를 울렸다. 그녀였다.


‘당장 따라 나오지 못해요! 지금 뭘 해야 되는지도 모르는 바보니까 알려 주는 거예요. 일단 절 보거든 밥을 산다고 하세요. 나 배고파요.’


문자를 읽자마자 남자는 자리를 박차고 방을 나섰다. 복도를 나서 몇 걸음을 떼지 않아 남자는 가방을 두고 나왔다는 걸 깨달았다. 다시 동아리방으로 들어가 가방을 챙겨 다시 나오려는데 그의 표정에서 뭔가를 짐작한 후배 하나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회장님,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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