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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릭 Dec 05. 2020

이유는 없지만

뚜루루- 남자는 통화연결음을 들으며 창밖을 보고 있었다. 가끔씩 빗방울이 바람에 날려 유리창에 부딪혀왔다. 아직 남아있는 지난 계절의 기억들이 빗소리에 녹아들어 남자의 몸속으로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창유리 끝으로 우산을 비스듬히 세우고 비바람을 향해 한 노신사가 걸어가고 있다. 모퉁이를 돌아선 그의 까만 우산이 건물 뒤로 사라지려 할 때쯤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왜?”


여자의 목소리가 빗방울마냥 남자의 마음속을 구른다. 자신도 모르게 올라간 입꼬리에 남자는 잠시 틈을 두고 답했다. “그냥 비가 와서.”


“그럼 난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 웃음 섞인 짧은 숨소리 뒤로 싱겁다는 듯이 여자가 되물었다.


“아마도.” 대답을 하면서 남자는 비가 와서 생각이 난 건지, 생각이 났는데 마침 비가 온 건지 궁금해졌다.


“치... 그럼 비가 안 왔으면 딴 사람 생각했겠네?” 다시 여자가 물었다.


“어쩌면 그럴지도.” 남자가 대답했다.


여자의 목소리가 방금 딴 유리병 속의 탄산가스처럼 솟아오른다. “뭐야! 죽을래?” 


“내가 생각하는 사람이 언제나 같은 사람이란 보장이 없으니까.” 남자는 지금 자신의 말을 듣고 지을 여자의 얼굴을 상상했다. “그 사람은 언제 어떻게 바뀔지 종잡을 수 없거든.” 콧등을 찡그리며 윗입술을 앙다문 그녀의 표정이 창문 위로 잠깐 비쳐 보인 것만 같았다.


“흥! 지금 날보고 변덕쟁이라는 거야?” 그녀의 콧소리가 남자의 귀를 간질거린다.


거리의 풍경들이 창유리에 맺힌 빗방울들에 맺혀 반짝이고 있었다. “늘 새로움을 주는 사람이라면 훨씬 적당한 표현이 되지 않을까? 지금처럼 가을비가 부슬거리면, 어쩐지 비 내리는 창가에 딱 어울릴만한 여자니까 말이야.” 남자가 말했다.


“피..... 당신, 가을비가 오니까 가을남자가 된 거야? 그래서 그 창가의 여자를 지금 꼬시려고?” 후둑- 창을 두드리는 비바람 소리가 굴러가는 여자의 목소리를 북돋운다.


“어허~ 꼬시다니요. 그저 제 마음이 그러하다는 거지요.” 남자의 손가락은 풍경을 담은 물방울들을 차례로 문지르고 있다.


여자는 잠시 말이 없었다. 가만히 고른 숨소리만 전하던 그녀가 다시 나직이 속삭인다. “그러고 보니 벌써 단풍이 지려고 하네. 서글프면서도 참 곱다. 색깔들이 투명해.”


빗소리에 섞여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어쩐지 그 순간, 남자는 세상이 그녀의 목소리에 실린 거대한 물방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보고 있는 풍경 그대로 바로 찍어서 보내줄래? 한쪽에 예쁜 얼굴까지 담아주면 더할 나위 없지.”


“저기요, 맘대로 아저씨. 제가 그래야 할 이유가 있나요?” 투정이랄지 대답 같은 그녀의 물음 뒤로 유리창에 맺히던 빗방울들이 하나둘씩 미끄러져 내리고 있었다.


“이유는 없지만 간절한 마음은 있지요.” 창 너머 빗방울들 속에 잠긴 도시가 뽀얗다.




# Une revue, RH. 97: La Dernière Valse - Marie Perb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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