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은, 권위에 대한 복종
어떤 소녀가 있다. 아주 얌전하고 조용해서 사람들 사이에서 잘 띄지 않는다. 게다가 무표정한 얼굴은 말을 걸기에 그리 편안한 인상을 주지 못한다. 그때 누군가 그 소녀를 가리키며 “공주님이세요.”라고 말한다.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 소녀의 사소한 몸짓은 시선의 중심에 놓인다. 그 소녀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동안 미처 찾지 못한 것들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얌전함에서 예의바름을, 조용함에서 우아함을, 무표정에서 사려 깊음의 흔적들을 느낀다. 어쩌면 그중 어떤 부분은 그의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혈통에서 비롯된 것임이 틀림없다는 확신을 줄 수도 있다.
이것은 어떤 하나의 상황을 가정한 것이다. 물론, 똑같은 상황에서 이처럼 느낄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이와 비슷한 경험을 누구나 한 번쯤은 가지게 마련이다. 꽤 호감이 가는 가수가 있는데 알고 보니 명문대 출신이었다던지, 시덥지 않은 농담만 하는 친구가 사실은 대기업 회장 아들이라던지, 우연히 옆자리에 않은 사람이 알고 보니 베스트셀러 작가였다던지. 그 사실을 알기 전에도 충분히 매력적인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건 그 사실을 알고 난 뒤에는 그 사람에게서 이전에 가지지 못했던 어떤 고귀함이나 기품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막연함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단어가 있다.
아우라 Aura : 명사. 예술 작품에서, 흉내 낼 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 독일의 철학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예술 이론에서 나온 말이다. (국립국어원)
Aura는 어떤 사물이나 장소에서 느껴지는 특별한 분위기나 영적인 기운을 뜻하는 단어지만, 벤야민은 이를 예술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차용했다. 아우라는 작품과 그것을 보는 이 사이의 특별한 교감이다. 이는 그 작품만이 가진 유일무이한 경험이라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누구나 쉽게 제작할 수 있고,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것이라면 특별할 것이 없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으로 복제가 손쉬워짐에 따라 원본이라는 개념이 무의미해졌고, 그로 인해 더 이상 원본만이 지닌 아우라는 유효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그 이전과 가장 구별되는 현대 예술의 특징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하지만 현대의 진정한 예술품이랄 수 있는 산업제품에 있어서도 여전히 사람들은 아우라를 만들어낸다. 이를테면 어떤 제품이 전문가조차 구별해내기 힘들 뿐 아니라, 기능상으로도 완벽히 동일하다 하더라도 어떤 브랜드를 달고 있느냐에 따라 소비자의 인식과 태도는 완전히 달라진다. 이런 경우 제품이 아니라 브랜드 자체가 아우라를 지닌다. 아우라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지닌 특징이 아니라,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에 깃든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아우라를 만들어내는 것일까. 뭔가에 대해 단순히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왜 특별한 기운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우선 정보를 받아들이는 방식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람은 주어진 상황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분석해 낸다. 자신이 가진 지식과 경험을 통해서 선호하는 것과 기피해야 할 것, 감수해야 할 부분과 지켜야 할 것, 단기적인 관점과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차이 등을 살핀다. 최종의 선택은 그 모든 것의 총합결과가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결정된다. 여기서 유리함이란 각자에 따라 차이가 난다. 이완용이라면 우둔한 조선인들의 독립보다는 선진문물을 지닌 일본의 상류계급에 편입되는 것을 이익이라 생각했을 테고, 안중근 의사라면 그런 안일한 삶보다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내던진 자신의 삶이 훨씬 가치 있는 것이라 판단했을 것이다.
사람은 매 순간 온갖 복잡한 정보들에 시달린다. 석기시대의 인간이라면 오직 육체의 감각만으로 날씨를 예측하여 대비하고, 온갖 흔적들과 특징들을 찾아 사냥에 나서고, 언제 공격할지 모를 맹수를 경계하고, 독충들로부터 안전한 장소를 탐색했어야 했을 것이고, 현대의 인간이라면 새로 나온 휴대폰의 성능이 어떤지 사용기를 검색하고, 취직을 하기 위해 온갖 기업 소식들을 찾아다니고, 구입을 마음먹은 주택의 구조와 자산 가치를 확인해야 한다.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정보의 신뢰성이다. 신뢰성이 확보된 다음에야 유리함을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휴대폰을 산다고 가정해보자. 수많은 휴대폰의 사용기를 확인한다. 많은 글들을 읽으면서 대충 가격이 비슷한 몇 개의 제품으로 압축되지만 몇 가지 점에서는 도무지 판단을 할 수가 없다. 누군가는 유명 블로거의 추천으로 결정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단순히 브랜드, 누군가는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이 모델인 제품으로 결정할 수 있다.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여기는 아주 명백한 공통점이 있다. 더 이상 판단을 멈춘다는 점이다.
인간이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현대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 이건 너무 당연하지만, 누군가 왜라고 묻는다면 증명하는 건 쉽지 않다. 연주 시차나 도플러 효과를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그 수식을 도출해내기 위해서는 수준 높은 수학 지식뿐만 아니라, 그것을 별들을 관측한 자료에 적용해 분석해낼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듣는 이가 그 설명을 이해할 수 없다면 소용없는 일이다. 누군가는 인공위성에서 찍은 사진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걸 그래픽일 뿐이라고 말해버리는 사람이라면? 로켓을 타고 우주 밖에서 직접 확인시켜주는 것을 제외하면 사실상 증명하는 게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그것을 증명하지 않아도 당연한 사실로 인식한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아주 정확히 알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학교를 신뢰하고, 선생님을 신뢰하고, 교과서를 신뢰했기 때문이다. 어떤 정보를 받아들인다는 건 어떤 지점에서 의심을 멈추고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생활을 하는 인간에게 타인에 대한 정보만큼 중요한 건 없다. 문명 이전이라면 누구를 무리의 리더로 선택하는 것이나, 내부의 권력관계에서 누구와 친밀함을 유지하느냐를 결정하는 것이 생존에 직접적인 문제였을 거라는 건 쉽게 상상할 수 있다. 현대에서도 관계는 곧 그 사람의 존재를 드러내는 지표이고 대개 중요한 결정을 미치는 정보는 그 관계망에서 나온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처음 만난 사람의 정보를 취합해 판단한다. 특히 이성과의 사적인 만남이라면 단지 몇 초 만에 호불호가 결정된다. 외모에서 출발해 표정, 몸짓, 말투는 곧바로 실시간으로 분석되고, 앞서 말한 정보를 받아들이는 특징은 여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더욱이 사물과 달리 인간은 상황에 따라 어떻게 변할지 확신하기도 힘든 존재이기 때문에,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그 사람만의 확실한 장점은 가장 강력한 판단의 근거가 된다.
무리 생활을 하는 포유류는 보통 서열을 지닌다. 생물학적으로 인간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런 특징 때문에 인간에게 강력한 권위를 지닌 자를 선택해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드물다. 족장의 아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면 당장은 물론이고 미래에도 유리할 수 있을 것이고, 뛰어난 사냥꾼이라면 다음에 좀 더 많은 고기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르고, 돌도끼를 능숙하게 만드는 장인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 탁월함이야말로 그 사람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정보인 것이다. 탁월하지 못한 보통 사람에게 이런 탁월함은 매혹적이다. 이런 매혹이 바로 '아우라'이다.
서열의 관점에서 아우라는 일종의 권위에 대한 복종이라 볼 수 있다. 재빨리 권위를 인정하고 추종함으로써 그 좋은 관계를 바탕으로 비슷한 계급들 사이에서 먼저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권위를 지닌 무리에 속하게 됨으로써 그러지 못한 것보다 안정성을 취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단지 서열의 관점인 것이고 모든 인간의 행동양식이 기계적으로 동일할 수도 없다. 이를테면 오히려 모든 권력관계를 멀리한 중립적 지점을 점유함으로써 이익을 취하는 것이 때론 효과적인 전략일 수 있다.
서열확인은 오랜 무리 생활에서 비롯된 특징이지만, 인간은 또한 협력을 통해 고난을 헤치는 과정에서 상호존중의 유전자도 함께 새겨왔다. 비록 문명의 발생 이래로 대부분의 기간을 계급사회로 살아왔지만, 그런 존중의 특질은 근대로 접어들면서 개인성에 대한 자각으로 꽃핀다. 문화가 고도화되면서 본성에 의존하던 부분들이 사회적 시스템으로 조율되고, 지식이 보편화되면서 누구나 그 시스템을 활용할 기회가 열리게 되었던 것이다. 기존의 서열체계는 더 이상 효율적인 관리방식이 아니었고, 대신 개인적 가치를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 체계가 자리한다.
그러나 인간에겐 여전히 서열적 본능이 남아있다. 그리고 이는 특히 조직생활에서 쉽게 확인된다. 어떤 조직이든 의사결정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 서열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데, 서열문화가 강조되는 조직일수록 개인성에 반하는 행동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나치 같은 조직이 지배하는 사회라면 대단히 성실한 사람일수록 반인륜적인 행위의 주체가 될 수 있다. 그 시작은 히틀러라는 한 개인의 아우라에 매혹되면서 시작된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악의 평범성”은 이런 인간의 특징에 대한 고찰이다.
중세시대의 성화와 같이 모든 것을 절대자에게 바쳐버린 시대에 아우라 같은 묘사가 흔하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사람에 대한 아우라는 구성원들이 각자의 개인성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쉽게 나타난다. 인간 개개인은 대체 불가능한 존재들이다. 각자의 생김새, 생각과 감정들은 어떤 기회나 조건을 가지느냐에 따라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에 속한다. 그런 자신의 가치를 깨달은 존재들은 타인의 권위에 압도당하지 않는다. 그를 사랑하고 좋아할지언정 자신이 가진 기준을 바꾸지 않는다.
이성적 존재라 자처하는 인간은 자신이 동물이라는 사실을 잊기 쉽다. 제도를 통해 스스로의 본능을 관리해온 탓이기도 하고 지식과 경험은 언제나 자신의 행동들을 변명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내리는 대부분의 결정들은 본능에 따른 것이다. 어떤 이성에 반하고, 가족을 우선시하고, 안락한 집 이상의 건물을 원하는 것들은 그저 동물적 욕망일 뿐이다. 그런 욕망을 위해 이성의 능력을 최대한 이끌어내며 고군분투하는 것이다.
이런 욕망들은 당연히 죄악이 아니다. 오히려 적절히 운용되는 제도 속에서 본능의 실현은 삶을 풍요롭게 하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가 불안정해지고 시스템이 더 이상 조율해내지 못할 때 본능은 서로가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원천이 되고 만다. 자신의 생존이 최우선으로 변해버린 본능은 서열의 냄새를 맡고 권위에 복종하고 가능한 타인보다 좋은 위치를 차지해야하고 그러기 위해 타인을 억눌러야 한다. 헬조선이란 단어가 유통되기 시작한 것은 사람들이 이런 사회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아우라를 지녔던 한 사람의 몰락을 지켜보는 지금의 상황은 묘한 기분을 들게 한다. 스스로 선택한 정책결정자에게 고통받아왔던 사람들의 분노. 온갖 몰염치들로 입 닫고 봉사하던 언론의 갑작스런 태도의 변화. 이 모든 건 이미 오래전에 예견되었던 것들이고, 조금만 관심을 기울였다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던 내용이었다. 하나의 강력했던 아우라가 깨지고 이 사회는 이제 새로운 방향을 찾고 있다. 하지만 또다시 새로운 아우라를 향해 흐를지 그런 아우라가 더 이상 필요없는 곳으로 흐를진 알 수 없다.
지금 열기 가득한 이 에너지가 또 어떤 방향으로 물꼬를 털까하는 의구심 탓에 어딘가 붕 떠버렸다. 부디 이것이 좋은 계기가 되기를. 개인은 끝없이 소모되고 소수의 승자마저 불안하지 않은 모두에게 기회가 열린 곳을 흐르길. 행여 기회를 잡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하나의 개인으로 존중받는 그런 사회가 되기를. 그냥 나름 마음을 추스르고픈 생각으로 적어보는 글이다. 가끔 이곳을 나의 대나무 숲으로 삼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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