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릭 Apr 17. 2017

반말에 관한

혹은, 위계질서의 사회화.

한국어처럼 높임말과 낮춤말의 구분이 분명한 언어가 있을까. 대부분의 언어권에서 높임의 표현은 어느 한쪽을 낮추기보다는 평어에 기반을 둔 경어의 형태로 존재하며 이는 상하의 개념이라기 보단 친소관계, 즉, 친밀함의 정도를 나타내는 격식에 가깝다. 상하관계를 정하는 용법은 보통 없거나 있더라도 희미하게 남아있다. 그나마 한국어에 비견될 수 있는 것이 일본어인데 이마저도 친밀함으로 그 경계가 허물어진다.


이를테면 대화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긍정 부정(Yes/No)의 대답 하나만 보더라도 한국어에는 대화 참가자 사이의 관계에 상관없이 완전히 대칭적(서로 동등한)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일반적인 용법이 없다. 사장님이나 할머니와 아무리 가까워지더라도 “응”, “그래”, “아니” 란 표현은 사용되지 않는다. 이것은 철 모르는 손자와 할아버지 같은 아주 특수한 관계에서만 사용된다. 아마도 한국어를 제외한 모든 언어에서 예/아니요와 같은 단순한 대답에까지 존비가 존재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혹시, 아는 분이 계시면 댓글 부탁.)


또 한 가지, 대화에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호칭의 예를 들면, 한국어에서는 이름을 부르는 것은 오직 윗사람에게만 허용된다. 때문에 윗사람을 부를 때 ‘삼촌’, ‘이모’와 같은 친족관계나 ‘선생님’, ‘과장님’ 같은 직급으로 호칭을 대체한다. 심지어 ‘당신’, ‘그대’ 같은 중립적인 인칭대명사조차도 아주 특별한 상황에서만 사용될 수 있다. 반대로 대부분의 언어권에서 상대방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자연스러우며, 친밀한 관계에서는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상황이다.


한국어에서는 동사의 활용 자체가 서로의 관계 설정에 따라 하소서체(그렇게 하시옵소서), 합쇼체(그렇게 하십시오), 해요체(그렇게 해요), 하오체(그렇게 하오), 하게체(그렇게 하게), 해체(그렇게 해) , 해라체(그렇게 해라)의 순으로 다양하게 어법이 발달되어 있는데, 이는 자연스럽게 대화 참가자 사이에 상하관계를 설정하는 기능을 한다. 만약, 이것을 무시하는 용법이 사용되면 굉장히 이상하거나(노인이 아이에게 안녕하셨어요?), 굉장히 무례한(아이가 노인에게 잘 지냈어?) 표현이 된다.

 

위와 같은 한국어 용법의 사용에서 실질적으로 문제 되는 경우는 상대방의 말이 자신을 비하한다고 느껴질 때다. 흔히 생각하듯이 동방예의지국이라는 그다지 근거가 희박한 표현으로 포장되는 한국사회에서 한국어의 특징을 높임말의 발달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데, 오히려 한국어의 가장 큰 특징은 상대방을 아랫사람으로 낮추는 용법이 아주 노골적으로 발달되어 있다는 점이다. 상대방을 존중하는 화법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지만 상대방을 비하하는 말은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만약 당연히 높임말을 사용해야 하는 누군가에게 반말을 사용한다면 그는 엄청난 모욕감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화법이 강제로 상하관계를 규정하는 폭력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의 사유가 발달하면서 깨닫게 된 근본적인 반성들 중 하나는 그 사유를 드러내는 수단인 언어에 대한 한계성이다. 우리가 어떤 말을 사용할 때 우리의 생각은 이미 언어가 가진 틀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의문.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진리를 말했을 때 그 확실성은 무엇에 의해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생각은 한때 내가 사용하는 언어가 곧 내가 사는 세계라는 극단의 정점에 까지 오른다. 이건 곧 언어뿐 아니라 심리가 지니는 상대성에 의해 논박되긴 하지만 한 사람의 어떤 언어 환경이 그 사람의 생각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다.


여기에서 한국어가 지닌 이런 용법을 말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왜 한국인은 권위에 쉽게 순종하고, 타인의 시선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어딘가 소속되지 않으면 불안해할까. 이런 의문들에서 시작한 개인적 추론이다. 물론 이런 특징들은 모든 인간이 지닌 보편적인 경향성이긴 하지만 개인적인 관점에서 유독 한국사회에 두드러진 특징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사회생활이나 인간관계에서 아주 중요한 지점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이런 점들은 일본이 훨씬 심해 보이기도 하는데, 이는 아마도 일제의 침략으로 한국의 전통적 권위가 파괴되고 그 자리를 서구적 전통이 메웠기 때문일 수 있다.


이런 존비 체계를 지닌 한국어를 배우게 되는 모든 아이는 사회를 위계질서로 파악하게 된다. 아이는 말을 함부로 해도 되는 사람과 조심해야 할 사람을 구분하게 되고, 이쁨을 받으려면 어떤 말을 하고 나보다 약한 사람에겐 어떤 말이 허용되는 지를 무의식적으로 사고방식 속에 담는다. 그렇게 자라난 아이는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개인은 위계질서 내에서 통용되는 문화를 익혀야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닫게 된다. 그리고 위계 사회를 체득한 개인은 스스로의 능력보다는 그 체계가 가진 권위에 의해서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는 걸 당연시하기 때문에 사회에 진입하려면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자연스런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 결과, 이런 사고방식은 어쨌든 사회의 조직에 편입되어 확고한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인 압력을 받게 된다.

 

위계질서 내에서의 개인이란 관점은 언제나 개인은 약하고 불안한 존재로 인식된다. 때문에 부당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권위에 복종하고, 막연한 타인 전체의 시선을 통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점검해야 하고, 때문에 그런 불안감을 어딘가 소속됨으로써 해소하려는 욕구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위계질서에 대한 굴복은 한편으로 개인의 고유성을 계속 억눌러야 유지될 수 있기 때문에 언제나 상실감에 시달리게 된다. 아마도 자기계발이나 힐링이 출판계의 주된 주제가 된 것도 이러한 이유로 설명될 수 있다. 그것들은 위계질서 내에서의 적응과 자기억제에 대한 보상을 얻기 위함이다.


근래 이러한 한국어의 존비 체계는 높임말 쪽으로 통합되려는 것 같다. 불특정 다수와의 교류 확대, 통신기술의 발달 같은 변화가 좀 더 대칭적인(동등한) 화법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중세의 계급적 특징이랄 수 있는 존비어 체계는 개인성이 강화되는 현대 사회에는 어울리지도 실용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이런 높임 쪽으로의 경향성이 과연 통합을 이룰 것인가에 관해서는 회의적이다. 왜냐하면 경제성의 관점에서 높임말은 거추장스럽고, 높임말이 보편화될수록 오히려 반말의 모욕적 기능이 강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설이나 신문기사 같은 대부분의 활자화된 매체에서 한국어는 높임말이 아닌 반말(평어)이 사용된다. 때문에 사실상 높임말로의 통합은 불가능해 보인다.


개인적으로 대칭적 화법의 통합은 반말(평어)로만 가능해 보인다. 이게 가장 자연스러운 이유는 보통 일기를 쓰거나 혼잣말을 할 때, 아마 아주 특이한 사람을 제외하곤 높임말을 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상호존중은 서로를 똑같은 인격체로 대하는 것을 말한다. 자신을 타인처럼, 타인을 자신처럼, 이런 감정이입을 통해 서로의 입장을 확인하고 의견을 교환하기에 가장 적합한 표현은 자신이 자신에게 사용하는 표현일 것이다.


물론 이런 평어로의 통합이 실행될 거란 것에도 회의적이다. 첫 번째는 존댓말이 단순히 계급적 서열이 아니라, 나이와 관련된 지극히 사적인 인간관계에 깊숙이 뿌리 박혀있다는 점 때문이고, 두 번째는 이미 기성 화법에 익숙해진 사람에게는 윗사람이든 아랫사람이든 불편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국가적 차원의 인위적 개입, 교육기관에 입학하는 순간부터 모두가 서로에게 평어를 사용하게 하고, 그 기간이 최소 한 세대를 지날 때까지 지속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통합은 힘들어 보인다.


그냥 잠시 생각해본다. 서로에게 이름을 부르며 똑같은 어법을 사용하는 사회.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무례함이 아니고 반론을 듣는 것이 즐거움이 되는, 한낱 단어의 형태가 아니라 그 생각이 존중되는, 그래서 모두가 스스로의 생각에 자유롭고 또 책임지는, 그리하여 서로의 마음을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이게 가질 수 없는 꿈이라면, 위계질서에 좀 더 반항적인 개인들이 무수히 늘어나 서로를 향해 힘차게 목소리를 높였으면, 즐거웠으면.


가까이 - 시와

매거진의 이전글 비켜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