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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연극_유령 [공연]

살아도 사는 게 아닌, 죽어도 죽은 게 아닌

by 글쟁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각자에게 맡겨진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면서 살아간다. 부모와 자녀, 선생과 제자, 고용주와 노동자 등 다양한 종류의 역할에 우리는 무조건적으로 속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삶을 살아오면서 항상 나는 물음표를 가져왔다. 과연 이 역할을 부여한 이는 누구인가? 그리고 우리는 역할에 불만이 있어도 참고 이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라는 물음표를 말이다.


물론 본인의 의지로 역할을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역할이라고 함은, 앞에서 말한 단어들처럼 정확한 정의를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닌, 현재 자신의 처지를 말하는 것임을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자녀'라는 큰 역할이 있다고 하면, 말하고자 하는 역할은 사업가인 어머니와 의사인 아버지 사이에서 난 한 명의 아들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아들'이라는 큰 역할에 붙은 '미사여구'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오늘 말하고자 하는 연극에서도 이에 관해 이야기한다. '세상'이라는 '무대' 속에서 '배우'로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 그리고 원하지 않는 역할 속에서 고통받은 이들의 이야기를 말이다.




연극 <유령>


[세종문화회관] 유령 포스터.jpg


세종문화회관은 서울시극단의 2025년 두 번째 작품으로 고선웅 작•연출의 <유령>을 올렸다. 5월 30일부터 6월 22일까지 진행되는 연극 <유령>은 '사람으로 났다면 사람으로 살다가 사람으로 죽어야 한다.'는 화두 아래, 세상에서 잊혀진 이들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낸다. 특히 극중극 형식으로, 현실과 연극 사이의 벽을 넘나들며 관객으로 하여금 '삶'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질문을 수없이 던진다.


[세종문화회관] 연극 유령 프레스콜_15.jpg


연극의 주인공 배명순은 남편의 폭행에 시달리며 고달픈 하루하루를 보내며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의 새로운 인생을 향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도망친다. 그리고 자신에게 상처만 줬던 '배명순'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정순임'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고 살아간다. 하지만, 새로운 역할인 '정순임'도 '배명순'에 뒤지지 않는 고통스러운 역할이었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며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던 그녀는 '말기 암'이라는 말도 안 되는 '결말'을 받아 들고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 이후에도 그녀의 암울한 역할은 계속된다. '무연고자'로서 화장되지 못한 채, 시신 안치실에서 '유령'으로 떠돌게 된다.




연극이 나에게 남긴 것


[세종문화회관] 연극 유령 프레스콜_26.jpg


연극 속에서 배우들은 극중극의 진행 상황 속에서도 역할과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 갑자기 대사가 맘에 들지 않는다며 연출을 찾아 헤매고, 본인들끼리 열띤 토론을 하는 가운데서도 본인들이 과연 진짜 자신으로서 하는 이야기인지, 배우로서 하는 이야기인지를 구분하지 못한다. 혼란 속에서 배우들은 관객석을 향해 질문을 던지고, 관객 사이에 숨어있던 또 한 명의 배우가 나타나 그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행동하고 대사를 하면 된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나는 이 한마디에 크게 꽂혔다. 혹자는 인생이 곧 무대와 같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연극 속에서는 '연출'이 존재하지만 인생에서는 '연출', '작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연극에서는 'NG'가 존재하지만, 인생에서는 'NG'는 존재하지 않는다. 실수해도 그렇지 않은 것처럼 연기할 수는 있지만, 연극과 같이 아예 없었던 일이 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연극의 주인공인 '무연고자'들은 인생의 NG가 있었고, 결국 그 NG를 편집하지 못해서 끊었다 가지 못해 한없이 무너져 내렸고,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유령 신세가 되어버렸다고 볼 수 있다.


[세종문화회관] 연극 유령 프레스콜_30.jpg


연극에서는 유령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연기해야 한다. 하지만 <유령>에서는 오히려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함께 연기하는 배우들이, 앞에 있는 관객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눈과 귀로 명확하게 새기고 있다. 연출과 작가, 편집이 없는 인생이지만 끊임없이 지켜볼 수 있는 '조연출'은 존재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조연출'은 출연진들의 상태를 녹화, 공연의 상황에 따라 조절하고 조율하는 일을 한다. 그리고 연출이 없을 때, 연출의 대타를 하는 이들도 '조연출'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최선을 다해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배우들의 조연출이 될 필요가 있다.


유령은 죽은 자들의 영혼을 말하는 단어다. 하지만 연극 <유령>의 '유령'들은, 더 나아가 이 세상을 살았던 모든 무연고자는 어쩌면 살아있을 때도 마치 유령과 같은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살아도 살아있는 것 같지 않게 여겨지는 그들이 무사히 연극을 마칠 수 있도록 우리는 끝없는 참견을 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또 다른 배역이지 않을까?



#아트인사이트 #artinsight #문화는소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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