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엔 그가 생각난다.
3년7년3년_4화 by. 글지마
아침부터 비가 온다. 덕분에 아침부터 기분이 좋다. W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마자 팔을 뻗어 밤사이 작게 벌어져있던 창문을 밀어 제쳤다. 아침 출근하는 자동차가 빗물을 가르는 소리에 저절로 상체를 일으켜 먼지 쌓인 창틀에 폭삭 기대고 말았다. 그녀는 새벽까지 이어진 작업 때문에 퉁퉁 부운 눈을 들춰 하늘을 보았다. 하늘은 잿빛인데 우울 한 조각 머금지 않았다.
W는 발목을 덮은 까만 부츠에 납작한 발바닥을 욱여넣곤 무거운 장우산을 꺼내 들었다. 발목을 꽉 감싼 부츠는 마치 어떤 장대비도 막아낼 듯 든든했다. 으싸. 그녀는 각오하며 바닥에 놓인 흰색 쇼퍼백을 어깨에 짊어졌다. 벌어진 가방 사이로 노트북과 드로잉 노트, 조각난 채 휴지에 감싸진 네 개의 목탄, 철통에 담긴 색연필과 금방이라도 터질 듯 입을 힘겹게 다문 필통, 스테인리스 텀블러와 휴대폰 충전기가 보였다. 내쉬기도 무거운 한숨을 뱉으며 W는 재빨리 현관문을 나섰다.
버튼을 누르자 열리는 스크린 도어 사이로 빗소리가 홧홧하게 귓속을 울렸다. 어깨만 무겁지 않다면 두 팔을 자유롭게 벌렸을 텐데, W는 아쉬워했다. 우산을 길게 펼쳐 올리며 붉게 물든 자줏빛 보도블록에 발을 디뎠다. 고개 숙여 검은색 머리카락 흔들거리는 시야에 어느새 콘크리트가 들어섰다. 그녀는 바닥과 맞닿은 빗줄기가 터뜨리는 무수한 원을 감상하며 아파트 단지를 걸었다. W가 몇 살일 때부터 키가 컸던 나무들은 부지런하게도 아침부터 울창했다. 그 그늘 아래로 숨어들며 W는 군데군데 세월이 파먹은 시멘트 구멍을 피해 폴짝 뛰어 인도에 안착했다.
물기를 머금고 한껏 명랑해진 7월의 10시를 두리번거리며 걷다 보니 금세 인도 끝에 도달했다. 경사로라는 일말의 배려 따위 없는 도로 밑에는 빗물 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평소라면 돌아갔겠지만 오늘은 왠지 힘차게 발을 내디뎠다. 나름 조심한다 했거늘 풍덩, 발목이 아슬아슬하게 잠겨 버렸다.
“으아악.”
기분 좋은 비명을 지르며 재빨리 발을 뺐다. 색연필 철통이 잘그락거리도록 콩콩 뛰어 봐도 발목이 뽀송한 것을 보니 부츠가 성공적으로 방어한 모양이다. 비가 오니 갑자기 그가 생각났다. 사실 그는 불현듯 떠오른다. 무엇을 하고 있든 언뜻언뜻 찾아왔다. 정작 당신의 육체는 서울에, 녹음실에, 해외에 있으면서 영혼만 날아와서 나를 괴롭힌다.
‘너도 작업하고 있을 때 내가 생각이 나니?’
묻고 싶었지만 어쩐지 비참해질까, 의지를 갖고 묻지 않았다. 그럼에도 비 오는 날이면 산책을 좋아하는 그가 생각났다. 공원을 지날 때도, 여름 햇살에 유난히 반짝이는 푸름 이파리를 발견할 때도. 더위를 견디다 못해 가게를 뛰어나온 사장이 뿌리친 양동이에서 떨어진 물벼락에 후텁지근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순간이도 당신이 생각났다.
“너무한 거 아니니.”
생각해보니 너무했다. 언젠가부터 존재만으로 만인에게 감사 받는 당신이, 누구 하나 돈 주지 않는 그림을 그리느라 촉박한 내 인생에 날아드는 것은 아무래도 불공평했다. 아니 어쩌면 우리 사이란 영혼이 비행하지 않는다면 좁힐 수 없을 만치 멀지도 모른다.
비오는 날엔 <3년7년3년>이 쓰고 싶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