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닛 그렇게 기쁜 말투로,
나는 국적이 다른 애플 ID를 두 개 갖고 있다. 이제 하나는 필요 없을 것 같으니 없애려고 하는데, 비밀번호를 까먹었다. 보안 질문 두 개를 맞추면 패스워드를 알려주겠다는데 답을 까먹었다. 그럼 이메일로 보내줄까?라고 묻는데 생각해보니 그 이메일까지 삭제한 상태다.
이렇게 나이가 드는 걸까, 절망감에 아무 영문과 기호를 쳐댔더니 계정이 잠겼단다. 사람이 아닌 무생물, 그리고 내 기억력과의 싸움에서 한 없이 무기력해진 나는 결국 휴대폰을 들었다. 번호를 선택하라는 말을 따라 성실히 삐, 삐, 삐 숫자를 몃 개 누른 후에야 오늘의 상담사를 만날 수 있었다.
뭐라 성함을 말씀하신 것 같지만 유려하게 흘러간 자기소개 끝에는 고객을 향한 열렬한 마음만이 남아있었다. 나 또한 대학생 시절 경험을 통해 그들이 책상 위에 올려두고 매일 봤을 매뉴얼을 읊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최대한 착하게 내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내 상황에 당혹스러운 것은 상담사 분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디는 아는데 제가 비밀번호를 까먹어서요. 보안 질문은 기억이 안 나서 이메일로 보내려고 하는데 제가 이메일도 삭제를 해버려서."
"아, 그렇군요."
"예."
"혹시 계정도 잠겨있을 까요?"
"네."
"하아.... 그러시군요 (하핫)."
"예에. (하핫)"
"(하하하하하)."
"(하하)."
하지만 어느 상황에서도 (조금 웃긴 했으나) 해결책을 제시하는 우리의 상담원은 방법을 알려주시겠다며 일단 보안 문제를 풀어보자고 했다. '앗, 그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꽤나 난감했다. 계정의 언어가 영어로 설정돼있을 텐데, 앞으로의 상담이 아주 민망스러울 거란 확신 아닌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아. 질문이 영어로 돼있네요."
"네(하핫.)"
"그 첫 번째 질문이 꿈이 무엇인가인데요, "
what is your dream? 나는 아까 봤다가 대차게 틀린 질문이 떠올랐다.
"네, 그게. 영어로 the 띄고 author요. 그리고 앞에 T랑 띈 다음에 나오는 A는 대문자로 해주시겠어요."
이게 무슨 대탈출 문제 풀기인가 싶었다. 벽에 가려진 문제를 협동해서 푸느라 최대한 느리게 정확하게 말하는 퀴즈를 진행하는 기분에, 민망함에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아, 예. 꿈이 작가셨나 봐요. 작가, 작가 맞죠?"
"네(하하)."
"오우. 꿈이 작가셨구나."
이미 되긴 했는데요. 덧붙이고 싶었지만 TMI(Too much Information, 응 안 물었어.)일까 봐 아주 열심히 입을 꼭 다물었다. 그렇네. 아까까지만 해도 정답을 맞히려고 작가 author라는 영어 단어를 요리조리 바꿔가며 타자를 쳤을 뿐이지, 이제야 그 말이 머리에 박혔다. 그치, 이때는 작가가 '꿈'이었지.
순간 또 상상했다. 결국 작년에 취직했던 회사를 다니면서 이 말을 들었다면 나는 과연 어떻게 반응했을까. 지금처럼 배시시 웃었을까 아니면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잇지 못했을까.
"두 번째가, 이것도 영어네요. 처음으로 산 앨범이 무엇이냔데요."
"네 그거는, epik 띠고 hight요."
"아 저 띄고 다시 말씀해주시겠요?"
나는 그때서야 10년 넘게 좋아한 가수 이름을 잘못 얘기한 것을 깨닫고 다시 말했다.
"e p i k 띄고 h i g h요. 그리고 아까처럼 E랑 띄고 나오는 H는 대문자로 써주세요."
길고 길었던 알파벳 텔레파시가 끝난 후 우리(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다음 단계를 진행했다. 비밀번호를 받을 수 있는 이메일을 지웠으니 새로운 이메일을 설정해야 했는데. 상담사 분이 또다시 스펠링을 불러달라고 하셨다. 하, 제 이메일이 좀 긴데. 미국에서도 익스피디아에 전화를 할 때면 이메일 주소를 불러달라고 할 때마다 결국 이 순간이 오고 말았구나, 라는 비장한 마음으로 알파벳을 말하곤 했다.
"네, 그 m a d h o l i c e r요"
지금까지 이메일의 뜻을 캐치하는 분이 없었거늘-어쩌면 당장 일처리를 하느라 다들 바쁘셨을지도 모른다- 귀신같은 우리의 상담사 님이 "이게 매드 맞나요?"라고 물었다." 네, 맞습니다. 창피하지만 빨리 대답했다.
이제 마지막 관문만 남았다며 그는 내일 24시간 후에 오는 이메일에 3시간 안에 비밀번호를 재설정하면 된다고 세네 번을 말해줬다. 방금 새로운 이메일이 왔다고 알람 창이 말하거늘 그분께서 24시간 하라고 하시니 일단 알겠다고 말했다. 이메일이 온통 영어라서 당장은 읽기도 싫었다.
"아, 네 알겠습니다."
"혹시 까먹으실 수도 있으니까 알람 맞춰두셔도,"
"(하핫 그렇게 까진) 아 네 (하핫)"
"왜 그렇게 웃으세요?"
본인도 웃으면서 상담사 분이 물었다. 지금 이 상황이 너무도 웃기지 않나요? 하핫. 제가 원래 웃음이 많습니다,라고 말하기엔 어쩐지 소개팅하는 기분이라 나는 그냥이라고 답했다.
"제가 고민이 많으셨을까 봐 일부러 밝게 말씀드린 건데."
정말 덕분에 감사하게도 피곤했는데 많이 웃었습니다. 아마 육성으로도 감사하다 말했던 것 같다. 그는 끝까지 "혹시 하시다가 막히시면 내일도 전화 주세요. 저희 토요일도 하거든요!"라고 당차게 외쳤다. 아닛, 그렇게 슬픈 말을 신나게! 당신의 주말 근무에 슬픈 것은 나뿐인지 친절한 상담사 님은 더 물어볼 것은 없냐고 물으신 후 전화를 끊었다.
다음 날 그분의 친절한 걱정에 알맞게 3시간 안에 비밀번호를 못 바꿀 뻔했던 나는 다행히도 무사히 아이디를 삭제할 수 있었다. 괜히 애플 상담센터에 전화에서 '나 잘 지웠어요!' 자랑하고 싶은 오지랖이 차올랐지만 그저 미소 지으며 노트북을 닫았다.
꿈이 작가셨나 봐요.
그렇네. 나는 예전부터 꿈이 작가였네. 4년 전의 내가 알고 내 휴대폰마저 알았던 꿈을, 이제야 돌고 돌아 만났다.
* 이 매거진은 모바일로 읽기 좋은 글 편집을 거칩니다. 모든 글 및 이미지의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