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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지마 Oct 24. 2018

저것 봐! 미국 고속도로잖아

DAY01. San Diego / 빨리 사진 찍어











내 첫 해외여행지는 일본이었다. 초등학생 때 부모님 쫓아갔던 일본은 정말이지 멀고도 가까운 나라라, 나는 되려 당황하고 말았다. 도쿄 공항을 빠져나온 나는 이국적인 풍경을 바싹 끌어안을 생각으로 팔을 활짝 벌린 채 유리문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금방 의기소침해져 엄마 팔뚝을 붙잡고 말았다. 



"엄마. 간판만 일본언데?"



한국이랑 다를 게 뭐야. 가슴속에 활화산을 품고 사는 대한민국의 초등학생은 금세 도끼눈을 뜨곤 땅바닥의 돌을 차 버렸다. 그때의 나는 눈이 번쩍 떠지도록 진귀한 풍경을 원했지 마치 애니메이션 한 장면 속에 들어온 듯한 익숙함은 지루했다-지금은 가고 싶어도 못 가는 도쿄를-. 






샌디에이고 가기 전에 들린 경유지, 애틀랜타 공항 





그런 내게 미국이란 얼마나 특별했던지. 대학생 시절, 미국으로 문화 교류 가는 프로그램이 홈페이지에 떴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고민도 없이 바로 지원했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나는 그저 맹목적으로 영어 쓰는 나라라면 발도장부터 찍고 싶었다. 





캘리포니아래. 좋지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라던데? 쌘, 뭐? 아 뭔 상관이야. 캘리포니아라며!






두려움도 얼추 세상 물정을 알아야 생긴다. 멋도 모르는 청년에게 조심하라는 조언은 그저 어른들의 잔소리일 뿐이다. 막 재수 생활을 마친 대학교 2학년은 긍정력 갑옷을 두른 천하무적처럼 태평했고, CNN에 나오는 총기 사고나 인종 차별에 대한 뉴스는 참 기게 막히게 나만은 피해 갈 것이란 자신감으로 넘쳐 났다.




머지않아 교류 학생 명단이 발표 났다. 나는 무려 친한 동기 세 명과 샌디에이고에서 한 달을 지내게 됐다.










대학교는 미국에서 공부할 곳을 연결해줬고, 그 학교 college는 학생들의 숙식을 책임져 줄 홈스테이 하우스를 매칭 했다. 우리가 11시간이 넘는 비행에 지쳐 학교에 도착했을 땐 이미 홈스테이 패밀리가 주차장에 자가용을 잔뜩 주차해놓곤 제 집에 데려갈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학생들의 친분 따윈 고려하지 않은 분배로 나는 방금 인사를 나눈-나중에 친해졌지만- 언니와 함께 한 가족 앞에 섰다.


미국에 거주하는 대만인 가족의 따뜻한 인사를 받으며 언니와 나는 일단 차에 올라탔다. 이때 내 영어 실력이 어땠었지. 그들과 나눈 대화 중에 기억나는 것이 없는 걸 보니 아마 되게 못했었던 모양이다. 홈스테이 맘, 캐런의 아들이 운전을 맡았고 어색함에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나는 차창을 스치는 풍경에 입을 떡 벌렸다.










우와 미국이야! 




별 다른 것도 없는데 잔뜩 흥분해서 나는 렌즈 비싼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어떤 포인트가 그렇게 신기했던 건지. 한국에도 있는 나무에 차에 국기이거늘, 그것들이 야자수이며 토요타에 성조기였단 사실이 그렇게도 신이 난 모양이다. 뒷자리에서 끊이지 않는 셔터 소리에 캐런과 아들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웃음이 나올 만도 했다. 고속도로 찍으면서 좋다고 하니 말이다. 누가 보면 한국에는 고속도로 없는 줄 알았겠어!






승하찰 벨이 따로 없는 미국 버스. 창문 위를 가로지르는 노란 줄을  아래로 잡아 당겨야  버스가 멈춘다.





하지만 확실히 미국과 한국은 달랐다, 물론 일본과는 미교가 안 될 정도로. 일단 미국의 국토가 한반도의 약 43배다. 물론 '한반도' 이야기이다. 남한만 놓고 비교해 본다면 그 *기회의 크기가 얼마나 달라질지는 개인의 상상력에 맡기겠다. 


이런 땅 크기의 간극은 두 나라 교통 시스템에도 큰 차이를 형성했다. 한국은 땅이 좁은 만큼 교퉁 수단이 잘 되어 있다. 지상은 이미 포화 상태라 지하철 만들겠다고 땅을 팔 때 온갖 광선 케이블도 함께 깐 것인지 어딜 가도 휴대폰이 터졌다. 도시의 블록마다 설치된 신호등은 쉬는 시간 없이 바쁘게 불을 껌벅였다.




*미국이 얼마나 큰지 새삼 느낄 때면 쉽게도 쓸쓸해졌다. 우리나라도 이렇게 컸다면, 과 같은 아쉬움이 남으며 비좁은 땅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청년들에게 애정 하는 마음을 보냈다. 어차피 나도 곧 돌아갈 테니.









하지만 미국은 이 넓은 땅에 원활한 교통수단을 고루 배포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심지어 시골에서는 택시나 지하철, 그 흔한 버스 조차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차가 없다 하면, 저녁을 만들기 위해 40분 걸어 식재료를 산 후 40분 걸어 집에 돌아와야 한다. 


그 결과 결국 개인은 소유 차량을 늘리게 되고 한 가족 1인 1차를 실행하게 된다. 1인 1차, 이 얼마나 멋진 라임인지. 덕분에 생긴 법규로, 미국에서는 최소 17세부터 운전 면허증 시험을 치를 수 있다(주마다 법이 다르지만).



이렇게 집집마다 차가 있으니 길거리에 보행자는 줄고, 차가 도로의 주인이 되면서 생긴 것이 바로 위 사진과 같은 버튼이다. 누군가 저 버튼을 누르기 전까지 차량은 방향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신호에 걸릴 일이 없다. 때문에 보행자는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반드시 저 버튼을 눌러야 했고, 이 사실을 몰랐다간 집에 돌아가라는 초록불을 영영 보지 못한 채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Flickr @Peter Daniel






사실 내가 그랬다. 아무리 기다려도 바뀌지 않는 신호에 의구심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아니 저 **손바닥이 사실 가라는 뜻 아닐까?




한국인이라고 무시하나 라는 자격지심까지 들려고 할 때 뒤에서 나타난 사내가 전봇대에 붙은 버튼을 눌렀다. "오오!" 같이 있던 언니와 나는 동시에 눈을 번뜩이며 서로를 바라봤다. 시각 장애인들을 위한 안내 버튼인 줄로만 알았지 횡단보도를 건널 때마나 이걸 눌러야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처음에는 또 신이 나서 좋다고 언니보다 먼저 달려가서 버튼을 누르기도 했지만, 나중에도 까만 동그라미를 누르는 게 생각보다 손바닥 아픈 일이라 남에게 미루곤 했다.




**샌 디에이고는 신호등 색깔이 아니라 손바닥과 이모티콘으로 신호를 알린다.





미국에선 길 하나 건너느라 이리도 진이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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