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선 안 하던 짓들
해외만 나오면 돌변하는 사람이 여기 있다. 비행기 못 타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는지, 나는 대한민국의 국경선만 벗어나면 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어째서 타국에 발만 붙이면 여유롭고 자유로워질까. 노동은 없고, 오직 휴식만은 전제로 한 여정이기 때문일까. 그렇다고 하기엔 국내 여행에서도 하지 않는 '짓'들이 너무도 많다.
"누가 보면 반 평생을 해외에서 산 사람인 줄 알겠다 얘."
누군가 비아냥거릴지 모른다. 실제로 나는 미국에서 고작 1년을 살았을 뿐이고,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때의 경험은 나날이 기억 속에서 흐려졌다. 하지만 내 인생에 있어서는 무엇보다 찬란하고 강렬한 불꽃놀이었다.
일단 단추 하나를 풀었다. 그리고 이어폰을 귀에 꽂는 대신 와이셔츠 가슴골에 선글라스를 꽂았다. 너무 깊나-물론 가슴 사이즈를 말한 건 아니다-, 싶다가도 그냥 내버려뒀다. 뭐 어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벌어지는 옷감 사이를 잡느라 꽂아두었던 클립도 빼냈다. 쓰레기통에 바로 버렸다. 한국에 돌아갈 때까진 쓸 일이 없을 테니까.
시선의 해방. 타인으로부터의 자유.
남자들은 걸으면서도 속옷 사정을 정리했고 여자들은 브래지어를 이리저리 고쳐 입었다. 이런 홀가분함은 어디서 태어났나. 일단 나를 -어떠한 이유로든 과도하게- 쳐다보는 사람이 없다고 확신이 들어서일까. 아니면 그네들이 나를 어찌 쳐다보든 상관없다는 일명 '아이돈케어' 마인드 때문일까. 덕분에 내 옷도 날이 갈수록 파지고 짧아졌다.
그리고 이어폰을 가방에 넣었다.
"왜 여기 사람들은 음악을 이렇게 안 듣지."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독일 드레스덴을 걸으며 이어폰을 낀 사람은 하루에 서너 명을 보는 게 고작이었다. "어쩌면 못 듣는 걸지도 몰라."라는 생각은 여행 4일 차 때 떠올랐다. 데이터는 3G로 터지고 교외로 조금만 나가면 안테나가 사라졌다. 지하철에서는 NO SERVICE였고 심지어 카페들도 신호가 약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주로 책을 읽는다. 차창을 멍하니 바라봤고, 친구와 수다를 떨었다.
물론 그때 마침 이어폰을 잃어버리기도 했다-아니었다면 아마 힘들었을 지도-. 애플 사 이어폰은 2만 원을 훌쩍 넘기니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했다. 가끔 친구들이 보이스 톡을 걸을 때면 휴대폰 마이크에 대고 속삭이는 불편함이 있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숙소는 6인 베드. 이어폰이 없으니 유튜브, 좋아하는 가수의 라이브고 음원 스트리밍이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저 꼼작 없이 침대에 앉아 일기나 썼다.
"으아. 음악 듣고 싶다."
커피에 이어서 내가 '듣기' 중독이었단 사실을 알게 됐다. 귓구멍에 하얀 기계를 꽂고 있음으로써 얼마나 큰 안정감을 느꼈는지 깨달았다. 그러던 와중에 독일에서 체코로 넘어왔다. 구시가지에 위치한 틴 성모 성당에 찾았다가 당일 저녁에 콘서트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콘서트 볼래?"라고 티켓 담당자가 건조하게 던진 말에 나는 올타꾸나, 체크카드를 내밀었다.
첨탑처럼 높게 솟은 성당 안에서 풍성한 현악기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중에 등장한 메조소프라노는 목소리가 구슬퍼서 나는 몇 번이나 울컥했다. 이어폰을 잃어버린 대가는 아까운 3만 8천 원이 아니라, 510년의 역사를 가진 성당에서의 콘서트였다.
여행은 불행을 낳고, 불행은 우연한 행운을 불러왔다.
한국에서는 잠깐 멈춰 설 시간조차 없다. 이렇게 노천 카페에 앉아 성당을 그릴 생각은 못 하겠지. 잠시 쭈그려 앉아 숨을 고르고 있다면 아마 오지랖 넓은 누군가 물어볼지도.
"그럴 시간이 있니?"
진심으로 걱정이 돼서 하는 소리야, 와 같은 개소리를 바라진 않았는데. 나는 잠깐 힐링했을 뿐이라며,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난다. 다시 전진. 멈춘다는 건 뒤쳐진다는 것. 바쁜 나날만이 무해하다. 유익했던 오늘은 깊은 밤 침대에 쏟아진 -피로에 찌든- 내 몸뚱이가 증명한다.
그래서 여행을 간다. 어쩔 수 없이 쉬려고. 할 수 있는 거라곤 햇빛 속을 걷기, 즐길 수 있는 거라곤 여유뿐이니까. 조금 느슨해진 옷차림으로 오늘도 나는 이어폰 대신 책상 위에 올려둔 선글라스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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