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들서가 x brunch
9월 17일. 브런치에 이런 공고가 올라왔다.
집필실이라니. 내 주변 사람들은 흔히 '작업실'이라고 일컫는 공간이었다. 스스로를 아직 작가라고 칭하는 게 창피한 만큼 황송한 낱말이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무엇일까.
브런치에 공지 하나가 올라왔을 뿐인데 나는 벌써부터 스스로를 '집필실에 들어가기엔 부족한 아마추어'라고 단정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집필실이라는 단어는 너무 고급지다. 일상작가로 뽑힌 지금도 가끔 인스타그램 피드에 #집필실 을 쓸까말까 무척이나 고민한다.
9월 24일. 모집 일정 마지막 날이 닥쳤다.
나는 친구에게 전화해서 낙담했다. 된다고 하더라도 잡힌 일정이 너무도 많았다. 미리 걱정하는 내게 친구는 딱 한마디만 했다.
야. 일단 되고 고민해.
점심 메뉴나 구매할 엽서 선택은 못하면서 이럴 땐 단호한 친구가 고마웠다. 나는 일단 알겠다며 카페에서 노트북을 켰다. 오랜만에 자소서를 쓰는 각오로 모집 공고를 살펴보았다.
노들섬. 솔직히 어디에 있는지 잘 몰랐다. 심지어 뚝섬 근처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렇다면 집에서 가는 데만 최소 두 시간. 과연 집앞에 5000원 내면 갈 수 있는 카페를 대신해서 노들섬까지 가는 게 맞는 것일까. 순간 의문이 들었지만 공고문에 적힌 한 문장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여러분들의 집필실은 어디인가요? (...) 집 앞 카페에서 항상 앉는 그 자리. 또 누군가에는 출근길 지옥철 안이 집필실일 수도 있겠지요. 오롯이 글에만 집중할 수 있는 나만의 집필실을 가지고 싶다는 상상. 브런치 작가님이라면 누구나 해 보셨으리라 짐작됩니다.
나는 매번 가는 카페가 정해져있다.
24시간 투썸 가장 구석 1인석. 2층짜리 스타벅스 자동문 열리면 보이는 자리. 할리스커피 볕 안드는 4인용 소파. 커피빈 창가 안쪽 좁고 까만 의자. 3층 투썸 책상 높낮이 최상인 창가. 그 외에도 이디야부터 개인 카페까지 나는 동네에 커피 파는 곳이라면 다 꿰고 있다.
작업실 방랑 생활도 햇수로는 3년 차. 나처럼 오래 카페에서 일한 직원 분들과 아침에는 인사도 나눈다.
오늘은 뭐 써요? 소설? 여행은 또 언제 가?
누군가 내 소식을 궁금해준다는 건 기쁜 일이다. 온종일 입으로 떠드는 대화 없이 컴퓨터에 글만 쌓는 하루에, 사람과의 대화만큼 값진 기분전환이 없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1인칭 소설과 3인칭 소설의 장단점'이나 '대명사를 사용하는 빈도수', '과거형 서술어의 매끈한 사용법'과 같은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는 없었다. 그분이 내게 카페에 들어오는 물건의 수량과 재고, 공휴일에 어떤 식으로 스케줄을 짜는게 좋을 지 물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카페는 결국 공공장소. 나는 값을 지불하고 커피와 공간을 빌릴 뿐이다. 오늘 내가 앉은 자리에 내일 누군가 앉는다. 물건을 맡겨두고 내일 또 꺼내 쓰기는 커녕, 화장실을 갈 때마다 소지품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다. 어쩌면 한강에 떠 있는 노들섬처럼 정처 없는 방랑 생활. 매일 주인이 바뀌는 카페 말고 나도 이제는 집필실이 갖고 싶었다.
마감까지 몇 시간 쯤 남았을까. 나는 지체 없이 신청서 파일을 열었다. 생각보다 쓸 게 적었고 생각할 시간이 많아야했다.
주소를 적으면서 한 문장을 덧붙였다. 당시만해도 노들섬이 뚝섬 인근에 있는 줄 알았기 때문에 -나조차도 안 서는- 확신을 드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말하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나는 일단 뱉어놓고 행동으로 옮기기로 했다.
나는 먼저 심사 목록에 주목했다.
QnA. 당선자에 대한 심사는 어떻게 진행되나요?
신청서의 양식에 맞게 작성하여 제출한 작가님에 한해, 지원 동기와 활동 계획 및 프로그램 운영 계획의 완성도, 참신성, 실행 가능성 등을 기준으로 종합적인 평가를 합니다.
그리고 이 문장을
지원 동기_참신성
활동 계획_실행 가능성
프로그램 운영 계획_완성도
이렇게 읽었다. 심사 항목을 자세히 파헤치고 있자니 취준생 시절이 떠올랐다. 회사가 원하는 인재임을 자처하기 위해 썼던 자기 소개서. 2년 만에 다시 써보니 감회가 남달랐다. 물론 그때는 목숨을 걸고 썼다. 마치 막다른 길목 위에서, 내가 제출한 문서 하나로 생사가 오가는 듯한 아찔함을 느꼈다. 하지만 이번에는 즐거웠다. 이렇게 신청서나 작가 정보를 보낼 때면, 내 과거와 초심을 되짚어볼 수 있어서 고맙기도 하다.
마지막 표 안에는 내가 좋아하는 책들로 가득 채웠다. 밑줄 긋고 책장이 구겨지도록 읽은 책들. 너무 아껴서 기부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어쩐지 뽑히려면 이토록 좋아하는 책을 써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노들서가에서 전화가 온 건, 그 주 27일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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