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드로잉

손목 잡기 금지법

어쩌다 발견한 하루를 보면서

by 글지마







어쩌다 발견한 하루


요즘 MBC 드라마 <어쩌다 발견한 하루>를 보는 재미에 푹 빠졌다. 드라마는 다음 웹툰 <어쩌다 발견한 7월>을 원작으로 한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여고생 "단오"가 정해진 운명을 거스르고 사랑을 이뤄내는 본격 학원 로맨스물이다. 뻔하디 뻔한 스토리지만 그 안에 숨겨둔 설정값이 어마어마하게 흥미롭다.


어느 날 저녁, 엄마는 tv를 보고 있었다. 잠시 물을 마시려 나온 나도 거실에 멈춰 섰다. tv에서는 -가끔 채널을 돌리면 인기 VOD라며 광고하던- #어하루가 방영되고 있었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뛰어다녔고 여자 주인공인지 모를 캐릭터 뒤에는 뽀얀 효과에 장미꽃 CG가 떠다녔다.


"엄마 뭘 보고 있는 거야."


나는 소스라쳤다. 입으로는 경악했지만 시선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주인공들을 뒤쫓았다. 여자 주인공은 드라마 <스카이 캐슬>로 이름을 알린 김혜윤(예서로 더욱 유명한) 배우였다. 심장병에 걸려 약혼자만 10년 동안 짝사랑한 조연 캐릭터라는 설정과 달리 펄쩍 뛰고 통통 튀는 말투에 나도 가만히 소파에 착석했다.


"재밌네."


어느새 리모컨을 들고 vod 다시 보기를 눌렀다.





1화는 주로 드라마 <꽃보다 남자>를 떠올리게 했다. 사립 고등학교에서 잘 나가는 A3-종이야뭐야-에 속하는 남학생 셋이 기럭지를 뽐내며 교문을 걸어온다. '만화 속' 여주인 여주다-이름입니다-는 남주인 오남주-이 또한 이름입니다-와 친하다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한다. 사립고답게 남주는 과연 운전면허증은 있는지 궁금할 정도로 오토바이를 몰았고, 학생들은 교복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리폼을 하는 덕분에 패션 센스에 박수를 쳤다.


하지만 <어하루>에는 2009년에 방영된 <꽃남>과 다른 점이 있다. 바로 이런 뻔한 설정을 파괴하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은단오"라는 엑스트라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 엑스트라 혹은 단역 취급을 받던 "서브"들의 반란이 이 드라마의 키 포인트이다. 이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설정갑(운명)을 뛰어넘기 위해 만하에는 그려지지 않는 컷 바까에서 아등바등 난동을 부린다.





단역의 반란


최근 인기 끄는 웹소설을 통해서도 이런 트렌드를 읽을 수 있다.





<아도니스>와 <황제의 외동딸>


몇 년 전만 해도 회귀/환생물이 유행했다. 퍽퍽한 세상살이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많은 사람들의 '바람'이 '판타지'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인생 n회차"라는 말이 생겨났고 이번 생은 글렀다 는 유행어가 되었다. 드라마 또한 <이번 생은 처음이라>나 <첫사랑은 처음이라서>와 같은 제목으로 방영되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단역들의 반란이 독자들의 시선을 끌었다.




<전지적 독자 시점>과 <여주인공의 오빠를 지키는 방법>


웹소설 <전지적 독자 시점>은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김독자'가 10년간 읽었던 소설이 현실이 되면서 -이 세계의 결말을 유일하게 아는 그가-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단지 독자에 머물렀던 그가, 점차 주인공으로 거듭난다.


<여주인공의 오빠를 지키는 방법> 또한 비슷한 포맷을 취한다. 귀갓길에 교통사고를 당한 한 여인이, 읽던 소설 속 악역으로 환생한다. 물론 이 세계에서도 여자 주인공은 이미 정해져 있다. 그 여주의 오빠를 죽인 탓에 단명하게 될 "록사나"가 되어버린 그녀는 정해진 삶을 바꾸기 위해 여주의 오빠를 살리고 스토리를 완전히 뒤바꿔놓는다.





엑스트라에서 주인공으로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야



어릴 적 나는 그 말에 크게 공감하지 못했다. 당연한 얘기를 한다고 생각했다. 3자의 생각은 알 수 없고, 인생이란 자연스럽게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 이런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이 온다. 초고속으로 취업하고 대기업에서 억대 연봉을 받는 사람이 이 지구의 주인공처럼 느껴진다. 해외에서 인기를 끌고 성공한 동년배의 인플루언서들을 바라보며 결국 나는 "내 삶 정도의 주인공이구나"하고 깨닫는다. 그럴 때면 절로 우울해진다.


이런 퍽퍽한 세상에 돌파구조차 없다고 생각하면 절로 숨이 막힌다. 그렇다면 어차피 주인공도 아닌 삶, 단역에서 시작하는 건 어떨까. 사람들은 그런 혜안으로 신박한 트렌드를 창조해냈다. 비현실적인 신데렐라 스토리는 버리고 n차 인생 자수성가 판타지를 만들어냈다-사실 따지고 보면 이쪽이 더 비현실적이다-.





손목 잡기 금지법



이렇게 트렌디하고 재미있는 요소로 인기를 끄는 #어하루를 보면서도 살풋 인상이 찌푸려지곤 한다. 바로 여자 주인공 "은단오"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악혼자 "백경"손목 잡기이다. 어떤 드라마에서든 성별 따지지 않고 등장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예전부터 이런 장면을 싫어했다. 제 뜻대로 풀리지 않는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상대방을 무력으로 붙잡아두는 행위를 환멸했다. 말이 안 통하자 결국 힘으로 제압하려는 심보에 시청자인 나는 절로 부루퉁해졌다. 물론 손목, 잡을 수야 있다. 잡기만 한다면 무슨 문제일까. 제발 억지로 끌고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드라마 <어하루>에서는 이런 장면이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반복된다. 얼마나 많이 등장하면 인터넷 상에 "단오 손목 잡기 금지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까.


이런 스토리 속 클리셰를 느끼며 나는 소설 #유럽단편집 에 실린 <못난이>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그 장면을 짧게나마 아래에 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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