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국
아침에 깨어났다. 엄마 손이 날 흔들어 깨운다.
밥 먹으라는 정겨운 소리는 고등학생 이후로 오랜만이다. 시간은 오전 7시. 거실에 펼쳐놓은 27인치 캐리어 문을 닫고 현관 앞에 섰다. 엄마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독일에서 봐.
부모님께 이런 인사는 처음 해본다. 나는 21일간의 독일과 체코 여행을 끝마치고, 엄마와 프랑크푸르트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우리 모녀의 북유럽 투어는 56세 박 여사 인생에 첫 자유여행이 될 것이다.
인천에 살아도 인천 국제공항은 멀다.
나는 계양역에 내려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반대편으로 출근하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양복의 여자, 구두 신은 사내. 서류 가방을 든 노신사까지. 피로에 지친 얼굴만 빼면 나와 정반대인 사람들. 나는 일할 때조차 (글쓰기를 직업으로 여겨준다면) 평상복 차림이다. 가끔은 출근할 직장이 없어서 외롭다. 무엇보다 통장을 채워주는 월급의 부재는 심히 안타깝다.
지하철에 올라탔다. 차내에 사람은 많지도 적지도 않았다. 내 양쪽에는 자리를 조금 편하게 쓰고 싶은 아주머니와, 담배 냄새를 향수와 레이어드한 아저씨가 엉덩이를 붙였다.
'이 사람들을 마음 편히 아주머니 아저씨라고 부를 날도 얼마 남지 않았겠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제1여객터미널에 도착했다.
나는 C 체크인 카운터로 향했다. 지상직 승무원 한 명이 짐 부치는 승객을 돕고 있었다. 나도 셀프 체크인 기계에 수화물을 올려두고 탑승권을 발급받았다. 캐리어에 길쭉한 태그 부치는 걸 그녀가 도와줬다. 밤색 반팔 유니폼을 단정하게 입은 승무원은 멋지게도 표정이 밝았다. 분명 새벽에 나왔을 텐데.
한산한 공항을 죽 돌아보며 승무원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사람이 없는 건가요? 이렇게 한산한 공항은 처음 보네요.”
“지금 이 시간이 그래요.”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녀도 나처럼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미 단체 패키지 승객이 한바탕 왔다 가셔서 손님이 없다고 덧붙였다. 나는 이런 순간을 좋아한다. 사회적 가면을 쓰고 있던 사람이 빼꼼 본모습을 드러낼 때. 사적인 이야기를 들려줄 때 한없이 즐겁다.
짐 검사가 통과되길 기다리며 10분을 보냈다. 줄도 서지 않고 공항 검색대를 통과했다.
비행기에 탑승했다. 잠시 눈을 감고 있자 몸이 덜덜 떨렸다. 이륙 준비를 마친 비행기가 요란하게 비상한다. ‘벌써 12시인가.’ 시간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손목을 드는 것조차 귀찮았다. 언제 이렇게 익숙해졌을까. 쓰리샷 아메리카노보다도 내 심장을 뛰게 만들던 여행은, 연약한 감기약처럼 내성이 생겨버렸다.
‘이렇게 아무 생각이 없을 수가!’
어느덧 정신을 차리고 보니 비행기 안이다. 나는 마치 강물에 쓸려 가는 한낱 단풍잎처럼 무기력하다. 착륙까지는 한 시간. 내려서 뭐하지. 명확한 계획은 없다. 무엇을 보기 위해서가 아닌 뭐가 있다 길래 떠나는 해외여행.
“삶은 주체적으로 살아야지.”
세 어절뿐인 문장이 무겁다. 어깨에 평생 메고 갈 짐처럼 버겁다. 모르겠다며 복잡한 머릿속을 외면해보지만, 이제 그런 핑계는 스스로에게 먹히지 않는다. "잘 모르겠어."는 겁쟁이가 내는 소리. 그 문제로부터 도망치고 싶다는 반증이다. 뭐가 문제인지 잘 알고 있다. 그저 여행 중에는 잊은 채 살다가, 묵은지처럼 켜켜이 묵혀 두었다가 현실로 돌아가면 꺼내보고 싶을 뿐.
착륙을 위해 열어둔 창가로 구름이 청소기에 빨려든 듯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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