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지마 Nov 08. 2019

비행기 요람

무념무상








비행시간처럼 요상한 게 없다. 


대략 11시간. 승객이 공중에 갇혀 있는 시간이다. 한국 인천에서 출발해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닿을 때까지 우리는 넓이 약 46cm에 갇혀 꼼짝을 못 한다.   

  

신기한 조건이다. 일단 휴대폰이 먹통이다. 갓난아이의 아빠도, 엄한 선생님도 애들 손에서 휴대폰을 뺏을 순 없다. 심지어 직장인들은 채팅창을 엑셀로 위장하는 스킬을 지니지 않았는가. 현대인들의 숨구멍이 콱 막힌다.     


대안으로 음악을 틀어본다. 항공기 엔진 소리만 고막을 때린다. 마치 트램펄린에 뛰어든 난쟁이처럼 기내 소음이 나를 튕겨낸다. 음식도 한식 아니면 양식. 어쩐지 기내식도 맛없게 느껴진다(밥그릇 다 비운 것과는 달리)





그래. 영화라도 봐볼까. 앞좌석 뒤꽁무니에 달린 화면을 터치한다. 고객 취향 맞춤 빅데이터 분석이고 나발이고 그냥 무비 리스트가 뜬다. 덕분에 나는 매번 봐야지 하고 넘겼던 영화를 세 편이나 감상했다.     


첫 영화에서 어린 소년이 거미맨으로 변했다. 두 번째 영화는 영국 18세기를 배경으로 세 여자가 정치 싸움을 벌였다. 삼각관계는 언제나 재미있다. 영국 옆집으로 향하는 내 마음까지 두근두근하다. 마지막으로 히어로 물을 선택했다. 퍼런 코피를 흘리는 외계 전사가 지구를 구하기도 전에 나는 잠들었다. 영어 자막으로 관람하겠다고 설처 댄 탓이다. 영어는 이렇게 숙면에 좋다.     


깨어나서 기내식을 먹었다. 옆자리 어머님께 하나 남은 한식을 빼앗기고 양식 닭고기를 섭취했다. 잠시 오침에 들었다가 찌뿌둥한 허리를 이리저리 돌렸다. 간식으로 작은 갑에 담긴 부리토(충격적인 외국어 표기법의 예)를 먹으며 일기장을 폈다. 출국할 때는 메이드 인 코리아. 입국할 때는 주로 그 나라 수첩을 들고 오는 편이다.





테이블을 비우고 펜을 들자 옆에 앉은 중년 일행이 속삭였다.     


“옆에 일기 쓰나 봐.”

“젊어서 그런가, 눈도 좋아.”     


젊다는 게 참 좋죠? 나는 수더분하게 대답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곧 그들은 대화 주제를 넘겼고 나는 안심하며 일기를 써내려갔다.     


그때 기내방송이 나온다.     


“승객 여러분 잠시, 후 저희 비행기는 이륙하겠습니다. 좌석 등받이는 세워주시고 테이블을 접어주시길 바랍니다.”





* 모든 사진과 그림, 글의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새벽의 승무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