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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지마 Nov 09. 2019

이런이런. 수수료를 내놓으렴.

믿음 가는 금시계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했다.


비영어권 국가 여행은 언제나 떨린다. 외계 행성에 떨어진 영유아가 된 기분이다. 벌써부터 안내판에서 영어를 찾아보기 힘들다.      





배낭을 무겁게 메고 씩씩하게 걸었다. 비행기 옆자리 어머님들은 단체로 사라진 지 오래. 고향에 돌아온 현지인들은 발걸음이 빠르다. 나는 믿고 쫓아갈 가이드의 세모난 깃발이 없지만, 마음속에 이정표를 세우고 씩씩하게 걸었다. 저기 환율 현황판이 보인다.     


환율 현황판은 까만 대시보드에 1유로를 몇 달러에 살 수 있는지 표시하고 있었다. 그 뒤로는 투명한 부스로 네모난 간이 환전소를 마련해두었는데, 성인 하나가 간신히 들어갈 크기였다. 나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퉁퉁한 체격의 사내가 반갑게 인사한다. 새까만 턱수염에 금테 안경이 무척 인상적인 사내가 장사꾼처럼 랩을 뱉어냈다.


“안녕. 어디에서 오는 길이야? 혹시 독일에서 내리지 않고 경유해서 다른 나라를 간다고 하더라도 당장 유로가 필요할 텐데 여기서 환전해가는 건 어때? 내가 도와줄 수 있어.”     



이런이런 녀석. 수수료를 내놓으렴.



램프의 요정, 지니를 만난 줄 알았다. 19년도 윌 스미스 버전으로. 정말 마법이라도 부린 건지 발이 절로 향했다. 심지어 유니폼도 파란색이었다!


나는 코 묻은 돈으로 신께 제사를 빌듯 꼬깃꼬깃한 은행 돈 봉투를 가방에서 꺼냈다. 장담컨대 그는 프로였다. 점잖지 못하게 눈을 흘기며 액수를 어림잡지 않았다. 한결 같이 무관심한 척 계산기만 툭툭 건드릴 뿐.


5백 달러를 창구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는 내가 하려는 말을 미리 하는 재주가 있었다.     


“유로로 바꾸는 거겠지?”

“예스.”

“다 100유로로 바꿔줄까 아니면 다른 지폐도 섞어서 줄까.”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마치 여름밤 화장실에서 귀신을 만난 기분이다. 새까만 머리칼 대신 덥수룩 수염을 기른 이 외국 귀신은, 금시계를 자랑하며 현란하게 손을 놀렸다. 빨간 휴지와 파란 휴지를 번갈아 뜯으며 환율을 계산했다. 그가 중간에 위조지폐를 섞어 넣었어도 나는 눈치 못 챘으리다.      


“독일만 여행해?”     


돈 계산을 다 마친 그가 물었다. 나는 그제야 “미안. 체코 돈으로도 바꿔줘!”라고 외쳤다. 사내는 별 문제 아니라는 듯 눈썹을 으쓱했다. 왼쪽 서랍을 열어 다른 돈을 꺼냈다. 얘도 다양한 지폐를 섞어주겠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외국인이 지폐 세는 법은 아무리 봐도 신기하다. 가볍게 칼을 쥐듯 종이를 길게 붙잡고, 다른 손 엄지로 돈을 넘긴다. 짝짝 귀에 붙는 소리가 무례하게 느껴지는 건 내가 우리 엄마 밑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5만 원 권이 없던 시절. 엄마는 자주 돈을 셌다. 천 원이든 만 원이든 신기하게도 꼭 10장 이상을 지니고 다녔다. 읽던 책에 책갈피를 끼워 넣듯, 지폐를 셀 때면, 검지와 약지를 돈다발 사이에 끼웠다. 왼손잡이인 나는 굳이 엄마와 거울처럼 굴었다. 오른손에 1천 원권을 꽂고 왼손으로 몸통을 꼬아 올린 다음 오른손 엄지로 지탱했다. 왼손으로 최신식 하트를 그리며 종기를 넘기면 끝. 가끔 구경하는 엄마의 손놀림은 은행의 지폐계수기보다도 수려했다. 돈 넘어가는 소리는 공기를 가르는 활 소리처럼 화끈했다.     


저 금시계. 금시계가 번쩍거린다. 비싼 몸의 특징은 다 갖춘 시계였다. 커다란 하얀 면적. 시계침은 보일랑 말랑. 뒷배경이 너무 찬란해서 지금 몇 시인지 알려면 눈을 게슴츠레 떠야 될 정도였다. 짝퉁일까. 그런 의문은 들지 않았다. 타짜처럼 빠른 손놀림이 그의 시계를 찐퉁으로 판명 내렸다. 아니 금시계가 모든 것을 믿게 만들었다. 아니지. 저건 손님한테 떼먹은 수수료로 만들어진 티끌 모아 태산이 아닐까. 어쩌면 내 수수료는 다음 시계 장만에 쓰일지도 모르겠다.     


“좋은 여행 하라고.”     


그는 끝까지 눈을 잘 쳐다보지 않고 인사했다. 새침하게 계산기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제비처럼 재치 있는 어투에 나도 고맙다고 말했다. 이제 저 문만 넘으면 진짜 독일이다.





* 모든 사진과 그림, 글의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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