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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지마 Nov 10. 2019

이색찬란 팬티의 향연

혼숙 6인실






공항에서 잔뜩 헤매고 숙소에 겨우 도착했다. 독일 땅을 밟은 지 3시간 만의 일이었다. 지하철로 이동해도 되는 거리를, 구글의 잘못된 정보 전달로 인해 굳이 (한국으로 따지자면 KTX 급으로) 비싸고 빠른 ICE를 탔다. 

    


숙소 가는 길



체크인을 마치고 나니 저녁 7시였다. 친절한 직원이 길 안내를 맡았다. 내가 하루 동안 머물 방은 지하 1층 구석에 자리했다. 쾌쾌한 곰팡이 냄새는 다행히 나지 않았다. 지상 주차장과 연결된 큰 창 덕분에 내부도 넓어 보이는, 나름 소탈한 6인실이었다. 오른쪽 벽에는 2층 벙커 침대 두 개가 벽에 붙어 ㄱ자를 만들었고 왼쪽 창가 아래에는 싱글베드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당연히 벙커 아래 칸을 쓰고 싶었다. 조명도 닿지 않는 그 안락한 그늘 안에 숨고 싶었지만, 이미 누군가 선점한 상태였다. 영역 표시를 하듯 침대 주변에 널브러진 수건과 슬리퍼가 주인의 성격을 대변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싱글베드 하나를 골라 짐을 풀었다.      



본문에 나오는 숙소가 아닙니다



널브러진 수건과 물에 젖어 쪼그라든 슬리퍼의 주인은, 그곳에 3개월 간 머물고 있는 체코인 여행객이었다. 갈색 머리카락이 곱슬했고 키가 컸다. 20대 후반으로 보였으며 아랫배가 살짝 튀어나와 있었다. 그는 내가 씻는 동안 체격 건장한 친구를 추가 입실시켰다. 둘은 오래된 친구 사이로 보였다. 체코어로 떠들었고, 내게는 설핏 인사했다.     


자연스럽게 자기소개가 오갔다. 나는 내 국적보다도 “일주일 후면 프라하에 가는데!”라는 사실을 더욱 강조해서 말했다. 사내 둘이 눈을 빛냈다. 고향을 찾는 여행객에게 어떤 도시가 예쁜지 알려주었다. 프라하는 관광지라 외국인이 많지만, 만일 내가 시골에 간다면 현지인들이 나를 유명인처럼 쳐다볼 거라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우리는 밤새 나누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북한과의 관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넌 투어리스트야 트래블러야?
프라하 말고 다른 도시는 안 가?
Leibzig은 꼭 가야 해. 멋질 거야.
축구를 좋아한다고? 싸커가 아니라 풋볼이겠지.
아니지. 완전히 틀렸어. 잘 들어봐. 네가 말한 건 ”yaggoi”이고, 체코어로 안녕하세요는 “Ahoj!”    


나는 보답으로 “anyeonghasseyo.”를 알려주었다.     



슬리퍼를 벗고 침대에 몸을 누였다. 쌀쌀한 날씨에 담요만큼 널찍한 목도리를 이불 속 배 위에 깔았다. 체격 건장한 수염 침구와 나는 아직도 대화중이었고, 그때 곱슬머리가 화장실을 나왔다, 팬티 바람으로.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내가 넋 놓고 있는 사이 수염도 바지를 벗고 내 옆에 누웠다. 조신하게 다리를 모으고 이불을 끌어다가 급소를 가렸다.     





뭐지. 신혼 첫날밤에 덜컥 떨어진 기분이다. 처음 본 남자와 침대에 나란히 누워 대화를 나누는 이 상황이 비현실적이다. 옆으로 팔을 괴고 서로를 바라보는데 없는 마음까지 생기겠다. 나는 벗지 않은 나만 이상해지는 상황을 회피하며 이불을 바짝 끌었다. 미안하지만 피곤해서 먼저 자겠다고 말했다. 머릿속을 떠도는 빨간 팬티와 회색 팬티를 애써 무시하며 눈을 감았다.     


그날 내 침대에 서식한 수백 마리의 벼룩 때문인지 시차 때문인지, 나는 잠을 설쳤다. 새벽에 다섯 번이나 깨며 다음 목적지, 독일의 피렌체라 불리는 ‘드레스덴’으로 떠났다.     






모든 사진과 글의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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