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그파 200
독일의 KTX라고 할 수 있는 ICE를 타고 있었다. 기차 내부는 조용해서 옆 좌석 사람의 숨소리조차 크게 들렸다. 일상에 물든 사람들은 신문을 넘기고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찰나조차 특별한 순간인 여행객은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냈다.
KONICA LEXIO 70.
어느새 4년을 함께 한 필름 카메라였다. 우리의 첫 만남은 내가 자주 찾던 충무로의 한 인화 전문점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나는 카메라의 '카'자도 모르지만 사진을 전공한 친구의 영향으로 (독서를 벗어난) 유일한 취미 생활을 위해 필름 카메라 한 대를 구입하려고 알아보던 중이었다.
외관이 썩 예쁘진 않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구매했다. 대신 가격이 쌌다. 기계를 소중히 다를 줄 모르는 탓에 여기저기 여행 다니면서 많이도 부딪쳤을 텐데 카메라는 여전히 강건하다. 요즘에는 조금 투박해도 오래 쓸 수 있는 물건이 좋다.
필름을 되감았다. 36장을 쓰는 데 채 이틀도 걸리지 않았다. 카메라는 내 유년 시절, 졸업식이나 체육대회에서 들었을 법한 낡은 기계 소리를 내며 롤을 되감았다. 우우우웅.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나는 주변 눈치를 살피며 카메라를 품에 숨겼다. 끼릭끼릭 기계 소리가 조금 주춤한다.
꺼내고 보니 AGFA 200이었다.
아그파구나.
내 마지막 아그파. 단종된 필름.
여행을 준비하면서 필름을 대량 구매하려고 인터넷에 검색했다. 평소 잘만 보이던 "아그파 200 3900원"은 사라지고 두세 배로 뛴 가격을 발견했다. "뭐지?" 당혹스러웠다.
알아보니 이제 아그파는 생산이 중단된다고 했다. 벌써 여분의 필름을 가진 사람들은 뻥튀기를 해서 중고 매장에 내놓았고 "아그파 대신 사용할만한 필름 있을까요?"라는 질문이 사이트에 올라왔다.
또 단종이구나. 나는 친구를 잃은 것처럼 서글펐다.
쓰던 필름이 단종된 기억은 이번이 두 번째이다.
고등학생 때였나. 널찍한 정사각형 모양의 폴라로이드 "필름"이 생산 중단됐다. 덕분에 나는 함께 사용하던 카메라까지 창고로 내보냈다. 당시 나는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비주류의 문화는 언제든 경제적인 이유로 사라질 수 있었다. 그만큼 나약했으며, 자본주의는 값어치가 떨어지는 빈곤 분야를 손쉽게 멸종(단종)으로 내몰았다.
마지막 아그파를 내 촌스러운 파우치에 집어넣고, 후지 필름 C-200을 집어 들었다. 필름 카메라는 어김없이 롤 감는 소리를 내었지만 마음 한 편이 씁쓸하다. 단종된 필름은 새로운 필름으로 교체되지만, 아그파와 함께할 내 추억들은 이제 단종되었다.
살면서 나는 또 얼마나 많은 단종을 경험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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