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소서 첫 줄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했다. 초등학생 땐 만화, 중학생 땐 소설, 고등학생 때는 자기계발서를 읽었다. 글을 읽다보니 어느 순간 쓰고 싶었다. 그 시대 먹보의 꿈이 먹방 유튜버가 아닌 요리사였던 것처럼, 글 좋아하는 내 꿈은 자연스럽게 작가가 되었다.
첫 시작은 교과서 모서리에 작게 끄적였던 메모로 기억한다. 네모 곽 필통에 담긴 알록달록한 펜 중에서도 나는, 청포도 향기 나는 파란 펜을 유독 좋아했다. "수업 듣기 싫다"라는 단순한 이야기로 짤막한 일기를 썼던 초등학생이 지금 브런치에서 에세이스트로 이름을 걸고 활동하게 될 줄 그때는 미처 몰랐다.
작가가 되는 방법은 몰랐지만 일단 글을 썼다. 계속 글을 썼다. 21살에는 서울 예대 문창과 시험을 접수했다. 공부에 큰 뜻을 두지 않았던 내 딴에는 과감한 결정이었다. 재수를 마치자마자 엄마에게 말했다. 나 시험 보고 올게. 숱하게 책 읽지 말고 공부하라며 방문을 벌컥 열어 불시에 검문하던 엄마도 이번에는 잘 보고 오라고 했다.
문창과에 떨어지고 영문학과로 대학에 진학했다. 그래도 계속 글을 썼다. 인터넷에 소설도 연재하고 공모전도 도전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연락받은 곳 하나 없었고, 나도 자연스럽게 취준 열차에 올라탔다. 작가의 꿈을 잠시 접고 자소서를 작성했다. 목표 회사는 00뉴스. 글을 얼마나 잘 쓰는지 자소설로 보여줄 기회가 왔다.
한편으로는 자괴감이 몰려왔다.
내가 자소서 쓰려고 지금까지 글을 썼나?
수많은 시험 기간 동안에도 글을 연재하고 공모전을 준비한 게, 고작 자소서를 위한 글쓰기 훈련이었을까. 이상과 현실이 강하게 충돌했다. 마음은 딴 데 두고 일단 몸을 돌렸다. 열심히 쓴 자소설을 제출했다.
14살부터 소설을 썼어요?
면접 당일 대표님이 물었다. 무척 흥미롭다는 목소리였다. 공적인 대화가 아니라 사적 호기심이 묻어났던 유일한 질문. 픽션을 가미한 1500자 자소서에서 내가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나는 네, 하고 답했다. 대표님은 의미 모를 미소를 짓고 질문을 이어 나갔다. 청심환을 들이켜고 면접 봤던 사무실에서, 나는 그다음 주부터 근무를 시작했다.
출근 첫날, 부모님은 내게 만년필을 선물해주셨다. 활짝 웃으며 현관문까지 나와 잘 다녀오라며 배웅하셨다. 그 모습. 손을 흔들던 그 모습이 내가 일주일 만에 회사를 관두는 동안 가장 많이 떠올렸던 장면이었다.
글은 다 같은 글일 줄 알았다. 글쓰기는 다 똑같을 줄 알았다. 소설은 돈 못 버니까. 일단 기자로 일하면서 돈을 벌어두자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첫사랑을 놔두고 정략결혼 대상과 식을 올린 나는, 참을성도 없이 일주일 만에 파혼했다.
기사는 소설이 아니었다. 기사에는 내가 몇 날 밤새워 탄생한 캐릭터나 복잡한 서사가 없었다. 독자가 아니라 대표님께 내 글을 확인받아야 했다.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 마음이 갑갑해서 회사를 관두었다. 101대 1로 붙은 회사를 때려치우고 영어 학원에 취직했다. 또 일주일 만에 때려치웠다. 책임감 없는 내 모습에 실망했고 부모님은 더더욱 안타까워하셨다.
집에 있고 싶지 않았지만 돈이 없어 방안에 있었다. 사회 부적응자가 된 기분이었다. 글 쓰는 일은 힘들다며 친구들은 말렸고 부모님은 취미로 두라며 조언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여기까지 와버렸다는 걸.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스스로도 답답하고 갑갑해서 속이 시멘트로 꽉 찬 기분이 들었다.
2017년. 두 번의 연달은 퇴사 끝에 나는 우울한 마음으로 독립출판 클래스를 신청했다.
"아무도 내 책을 내주려고 하지 않아서 이 수업에 오게 됐어요."라는 게 거기 모인 대부분 사람들의 자기소개였다. 누군가가 내 글을 읽어주었으면 좋겠는데 책으로는 못 낸다고 하니, 그럼 내가 직접 만들겠다는 의지도 엿보였다. 그때까지 내 역할은 글 쓰는 '작가' 예비생이었다. 글 밖에 몰랐던 나는 그 수업을 통해 편집자, 인쇄 업체, 가끔은 마케터가 되었다. 힘겹게 책을 만들어갔다.
글 쓰는데 이거까지 알아야 하니?
퇴고하기도 바쁜데 포토샵으로 사진을 편집할 때면 이런 의문이 문득문득 치솟았다. 하지만 매번 그렇듯 계속 글을 썼다. 새벽 해를 바라보며 시뻘건 콧구멍에 휴지를 갈아 끼웠다. 누가 내 글을 읽어줄까. 돈 내고 이 책을 사줄까. 그런 의문이 발목을 잡을 때면 더 많은 글을 썼다. 키보드에 이마를 부딪쳐 졸음에서 깨어나는 그 짧은 순간에도 악몽을 꿨지만 계속 문장을 만들었다.
그렇게 1년 2년. 그사이 나는 세 권의 책을 가진 독립출판 작가가 되었다. 미국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내던 시절, 잠 못 이루는 밤에 지원했던 브런치는 감사하게도 구독자 1천 명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최근에는 EBS 다큐 프라임에 이름이 소개됐다. <brunch x 노들서가>의 일상 작가로 1분 정도 나온 게 다였지만 부모님께 메시지를 보냈다. 엄마는 신기해했고 아빠는 영상 링크를 사방팔방 아는 지인에게 뿌렸다.
몇 년을 변변찮은 수입으로 지내면서 항상 내 마음에 남았던 장면이 있다. 아빠가 건네주는 손바닥 위 만년필. 활짝 웃으며 현관문까지 나와 배웅하시던 엄마. 손을 흔들던 부모님의 모습.
나는 지금의 부모님께, 그때 내가 받은 만년필만큼의 선물이 되었을까. 그때의 보답이 되었을까. 다시 한 번 그 미소를 보고 싶다. 만년필은 더 이상 괜찮으니, 현관문까지 안 나오셔도 괜찮으니 그때의 뿌듯한 미소를 보고 싶다. 나의 자랑이 떠난다며 잘 다녀오라고 손 흔드는 부모님의 모습을 기억하고 싶다.
누구나 꿈꿔왔던 모습과 다르게 살 수 있습니다. 14살부터 꿈은 작가라고 정해두고 다른 전공에, 적성에 안 맞는 일자리를 구했던 저처럼 모두가 결국 목적지에 닿기 직전까지도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는 거겠지요.
누가 읽어주지도 않는 글을 매일 쓰고 고민 끝에 다듬는 그대에게 위로의 말을 보내봅니다. 글쓰기란 출발선은 있어도 도착점을 알 수 없는 마라톤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단 한 명이라도 응원을 해준다면 힘을 낼 텐데, 야속하게 나를 지켜봐주는 이 하나 없네요.
내가 이 길을 걷고 있다고 걸어왔다고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가, 노트북에 쌓여가는 문장들 뿐이라는 게 안타깝고 허탈한 날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오늘도 묵묵히 글을 쓰신 여러분들께 따뜻한 격려의 마음을 보내고 싶습니다. 작가님의 다음 글도 기대하고 있겠다고, 2년 전 제가 듣고 싶었던 말을 건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