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님 뫼신 날은 대가가 따른다.
영감님 오셨다. 손목을 내어 드려라.
머릿속 대문이 번쩍 열리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서야 한다.
참 모진 분이다 영감님은.
리클라이너 소파에 기대 버라이어티 예능을 시청하거나, 잠을 자려고 불을 끄고 눈을 붙인 순간 불쑥, 사람을 찾는다.
“이리 오너라.”
무시할까. 나는 속으로 고민한다.
티비가 너무 재미있는데요 영감님.
지금 옆에 휴대폰도 없어요.
메모장 찾기 귀찮단 말입니다.
딱 2분만 있으면 잠 들 것 같은데 (이씨).
여전히 티비를 보며,
이불 속에서 눈을 감고 모른 체 해본다.
내일 후회할 것이 두렵지도 않느냐!
떨어지는 불호령에 결국 엉덩이를 뗀다.
부엉이도 잠든 야밤.
나는 눈을 비비적거리며 손을 더듬거려 포스트잇을 찾는다.
아니야 오늘은 이 정도로 안 돼.
작은 메모지를 손끝으로 툭 밀고 더 큰 공책의 아무 부분이나 펼친다. 눈도 침침하니 내가 쓴 글씨의 궤적도 쫒지 못하는데 일단 쓴다. 뭘 쓰고 있는지 머리가 몰라도 손을 먼저 움직인다.
다 쓴 순간 일말의 고민; 까먹은 건 없나.
아까 생각난 게 한 세 개였던가.
잠들기 3초 전.
아니다. 다 적었네.
근데 너 내일 이거 알아볼 수 있겠냐.
공책에는 지렁이가 수십 마리 기어간다.
잠들기 2초 전.
잘 거야 말 거야 더 쓸 거야 말 거야.
잠들기 1초.
메모장을 모난 눈으로 바라보던 나는 결국 다시 연필을 쥔다. 내일의 나를 위해 오늘의 내가 설명문을 덧붙인다.
결국 찾아온 영감님을 뫼신 날은
잠에 들지 못하고 책상에 앉아
손목과 내 숙면을 대가로 글을 쓴다.
FM 아침형 인간인 내가
기상시간 7a.m.을 바치고
영감님 욕을 하며, 그래도 와주셔서 감사하다고 뒤늦은 점심 식사를 한다.
* 글쓰기 짝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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