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보다 온도, 높이보다 깊이

2026년 새해 첫날, 갓길 위에서 배운 태도의 가치

by 글지문덕




#1. 갓길에서 만난 온기


2026.1.1(목) 새벽 1시.

집으로 돌아오는 고속도로 위에서. 갑자기 고온 경고등이 켜지고, 차의 하부와 엔진룸에서 하얀 수증기가 구름처럼 뿜어져 나왔다. 폭발할까 무서워 즉시 갓길에 세웠다. 시간을 보니 새벽 1시. 새해 첫날에. 하필이면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올해 재수가 없으려나 생각이 들면서 짜증이 났다. 갑자기 히터도 작동하지 않았고, 영하 7도의 추위가 그대로 엄습하면서 더욱 기분이 안 좋아졌다.


울며 겨자 먹기로 보험회사에 견인 서비스를 요청했다. 그런데 견인차 기사님이 새해에 액땜했으니 좋은 일 많이 생기실 거라고 말해 주신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집에 도착해 잠자리에 누웠는데 그분의 따뜻함이 여전히 남아있다. 새벽 3시에 헤어질 때도 환하게 인사하시는 모습, 부드러운 말과 말투, 체온에 가까운 그 온도에 나까지 푸근해진 느낌이었다.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사람을 기억하게 하는 것은 바로
'태도의 온도'라는 것을.




#2. 정비소에서 만난 깊이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정비소를 검색했다. 1월 1일이라 문을 연 곳이 없었다. 겨우 한 군데를 찾아 전화를 해보니 다행히 정비가 가능하다고 한다.


정비소에 가서 이런저런 증상을 말했더니, 한번 보자고 하시며 능숙하게 진단을 내리셨다. 이 차종에서 자주 발견되는 증상이며 부품 교체하고 부동액 충전하면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 하신다. 기사님이 차를 보는 눈빛과 말속에 정비 일에 대한 애정이 보였다. 나는 단숨에 신뢰감을 느꼈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3. 구두방에서 만난 열기


좋아하는 구두가 너무 해져서 구두 수선방에 갔다. 내가 봐도 만신창이인 구두를 보더니, 빠르게 진단하신다. 해진 부위를 요리조리 살펴보신다. 마치 응급실에서 응급환자를 대하는 외과의사 같았다. 그러더니 내게 말씀하셨다.

“제가 금강제화 경력 20년이에요. 새것처럼 말끔하게 해 놓을 테니, 편안하게 하루 보내시고 내일 오세요.”

뒤돌아 나오는 나에게 재차 걱정 말라하신다. 그분의 자부심과 열정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나왔다.



#4. 상담원에게 느낀 태도


보일러가 안 돼서 콜센터에 전화했는데, 연결음이 끝나고 전화기 너머 직원의 목소리가 들리기 직전. 콧노래가 들렸다. 직원이 콧노래를 부르며 일하다 전화를 받은 듯하다. 통화하는 내내 전화기 너머에서 내 쪽으로 유쾌하고 즐거운 에너지가 시냇물처럼 흘러들었다.

내 설명을 들은 상담원이 말했다.


“어머, 불편하셨겠어요. 얼른 조치를 해드릴게요 ~ ♬”


말의 내용은 보통의 상담원 같았다. 그런데 어조 속에 마치 음표가 흐르는 것처럼 기분 좋은 바이브가 느껴졌다. 즐겁게 일을 대하고, 즐겁게 고객을 응대하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덕분에 불편감을 가지고 전화한 내가 점점 기분이 좋아졌다. 좋아하는 노래 한 곡을 들은 것처럼 그 여운이 꽤 오래갔다.


태도가 뭐길래.
나에게 이렇게 여운을 남기는 걸까.



문득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빅터 프랭클 박사의 말들이 마음속에 떠올랐다. 의미 있는 삶을 위한 태도의 가치. ‘삶이 주는 어려움과 고통들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선택하는 것’ 말이다.


현대 시대는 죽음의 수용소처럼 극단적인 환경이 드물다. 의식주와 안전이 보장되는 곳에서는 그렇지 않은 곳에 비해 상대적으로 난이도가 낮은 시련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마다의 아픔과 고통을 살아가는 현대인은 많다. 내 손톱 밑에 가시가 가장 아픈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도 최근 태도에 대한 고민이 있다. 그동안 속도의 태도를 갖고 있던 나였다. 상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답을 내려 버렸었다. 등산을 해도 정상에서 사진을 찍고 나면 서둘러 하산하며 시간을 계산했었다. 더불어 높이의 태도를 갖춘 나는 성과표 맨 위 줄에 이름이 오를 때에만 안도했었다.


요즘은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방향의 태도가 눈에 들어온다. 그 방향이 나의 가슴을 붙잡고 놓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내 가슴이 그 방향을 붙잡고 있는 것 같다. 그 온기가 가슴에 머물고, 그 깊이가 생각을 붙잡는 것을 보면.


이제 나는 속도보다 온도를, 높이보다 깊이를 선택하며 살고 싶어진다. 빨리 가는 사람이 아니라 곁에 오래 남는 사람이 되고 싶다.


스스로에게 가끔 묻는 질문을 바꿔본다.

오늘 나의 하루는 몇 도였을까? 얼마나 깊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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