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향해 보내는 극찬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어떤 수사어구를 동원해야 그 감동과 감탄과 벅차오름을 오롯이 전달할 수 있을지는 늘 숙고의 대상이다. 짧은 어휘력과 표현력, 말미암아 개탄스러운 창의력이 자책의 도마 위에 올라 맹렬하게 칼질 당한 것이 수차례. 흔한 표현 하나로 합의하는 것에 이르렀다. ‘취하다.’ 첫 음이 조심스럽게 세상에 떨어트리는 운율의 색 한 방울과, 맺힌 운율을 채색해 나가는 첫 음절의 정교한 붓질이 함께 조형하는 음악에 취하고 나아가 음악가의 목소리와 악기 선율이 채워가는 순간의 시간과 공간에 취하게 되는 것.
돌이켜보면 음악에 대한 관심과 친숙함은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물씬 풍겼던 것 같은, 희미해진 잔상이 아직 머릿속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여태까지의 삶이 흘러온 궤적을 또한 되짚어봐도 음악으로부터 완전하게 단절된 무미건조하거나 혹은 무자비하게 고된 시간의 구역도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현재로 눈을 돌리니 아침저녁마다, 필요한 순간마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음악이 재생되고 있음이 보인다. 이처럼 꽤 긴 시간에 힘입어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취한다’고 감탄했던 횟수를 세는데 두 손 이상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고 그중에서 가장 첫 셈을 늘 차지하는 것이 바로 광석이 아저씨의 음악이 되겠다.
취했던 순간의 장면. 천장에 비스듬히 달린 작은 유리창. 유리를 통과한 달과 별의 희미한 손짓이 새벽의 어둠에 섞여 퍼지는 침묵의 공간. 어렴풋한 사물의 윤곽 위로 피어오르는 따스한 회색 담배 연기, 그리고 마에스트로가 내젓는 최후의 손짓 같은 목소리, 「외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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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의 저녁 혹은 주말의 낮. 가끔 텔레비전에게 강제 휴식을 명했던 그 시간의 거실을 채운 것은 광석이 아저씨의 음악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물건을 불쑥 구해오는 당시 아버지의 수완은 컴포넌트 오디오 세트가 거실 한구석에 서 있게 했고 한 식구가 된 그 녀석에게 또한 소위 리어카 길보드 차트에서 사 왔을 광석이 아저씨의 카세트테이프를 재생하게 했었다.(90년대의 길보드 차트에 대해서는 추후 언급하겠다.) 90년대라 함은 ‘서태지와 아이들’을 필두로 빅뱅을 연상케 하는 양적 확장을 보인 대중가요 르네상스의 시기였다. 온갖 예능 프로그램과 주말을 수놓은 음악 프로그램과 또래 친구들과 집중적으로 르네상스를 향유하던 중학생 꼬맹이에게 광석이 아저씨의 목소리는 충분히 낯설었고 귀를 잡아끄는 질감은 어렴풋이 느꼈으나 진득하게 곱씹기에는 거칠었고 썼다. 마치, 스무 살에 마셨던 석 잔의 소주와 전부 게워냈던 그날의 고통만큼이나.
닭 목을 비틀어도 해는 뜬다고 했나. 원하든 원치 않든 시계태엽은 계속 굴러갔고 한국 대중가요의 바다가 아이돌 음악으로 폭풍우 치던 2000년대 중반. 힙합 음악에 심취해있던 20살의 어린 청년이 마주한 대학교 1학기 중간고사 기간을 눈앞에 띄운다. 시험공부의 명목으로 친한 동기와 선배들이 과 학생회실에 옹기종기 모여있다. 진짜 시험 준비생은 도서관 열람실에 가고 공부를 명목으로 밤새 입을 터는 가짜 준비생은 학생회실에 모인다는 전설은 이때도 현실에서 숨 쉬고 있다. 서로 시험 망치자는 암묵적 합의를 한 마구니들의 수다는 새벽이 깊어져서야 끝났고, 전쟁터 피난민 마냥 누구는 테이블 위에, 또 누구는 일렬로 붙여 놓은 의자 위에 누워 잠들어 있다.
공부는 안 했고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해가 뜨면 시험은 봐야 하니 불안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 쉽게 잠들 수 있기 만무한 그때의 나는 몸을 일으켜 과 학생회실 구석에 하나 남은 의자에 앉아 담뱃불을 붙였다.(지금과 달리 흡연자였고 실내 흡연이 법으로 금지되기 전이었음을 강조한다.) 호흡계를 한 바퀴 휘돌며 날카로운 상처를 낸 회색 연기는 누그러진 열기를 품고 입 밖으로 탈출했다. 모두가 잠든 새벽의 어둠. 피어오른 연기가 부서지는 소리에 고개를 드니 비스듬히 천장에 매달린 유리창에 부딪힌 연기는 한숨을 내쉬고 있었고 달과 별의 부드러운 손짓이 그 한숨을 달래는 듯했다. 혼자만 깨어 있기 때문이었을까. 원하지 않은 전공과 따라서 하고 싶지 않은 시험공부에 대한 괴로움 때문이었을까. 허기진 마음은 외로웠고 쓸쓸했다. 위로해 줄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러나 누군가를 구하기에는 늦은 시간이었고 하소연할 누군가도 없었기에 움츠러들던 몸은 곧 광석이 아저씨를 떠올렸다. 몸짓패에 가입하여 문선 활동을 시작하면서 집에 있던 오디오 플레이어를 과 학생회실에 가져다 놨더랬다. 카세트테이프와 CD를 재생할 수 있는 플레이어 안에는 광석이 아저씨의 목소리가 담긴 테이프가 들어있었던 것이 기억이 났다. A 면인지 B 면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그저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날들」
「거리에서」
「사랑했지만」
「먼지가 되어」
「서른 즈음에」
「타는 목마름으로」
「부치지 않은 편지」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그리고
「외사랑」.
“공장의 하얀 불빛은
오늘도 그렇게 쓸쓸했지요
밤하늘에는 작은 별 하나가
내 마음같이 울고 있네요
눈물고인 내 눈속에
별 하나가 깜박이네요”
광석이 아저씨의 먹먹한 읊조림이 어두운 공간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두 개비 다음에 세 개비, 그리고 끝없이 이어진 회색 담배 연기를 천천히 휘저으며 내 속으로 들어온 그의 쓸쓸함은 혈관을 타고 심장으로 흘러와 외로운 심장 박동을 어루만졌다. 달과 별의 소리가 잦아들고 숨죽인 정물과 잠든 인물의 흐린 윤곽이 담배 연기의 애처로움이 보이지 않을 만큼 뚜렷해진 햇빛의 시간까지. 망각의 강을 거슬러온 광석이 아저씨의 노래에 취한 시간이었다.
나 혼자 깨어 있었고 당시의 내 몸에 직접 새겨진 느낌은 아무리 노력해도 온전하게 전달할 수 없다는 점은 만족스러우면서 아쉽다. 만족의 비율이 좀 더 큰 덕분에 이때 이후로 선곡 목록은 온통 광석이 아저씨의 노래 일색이 되었던 것이 대학교 초창기의 이 년. 군 전역 후 미국으로 넘어간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영어 실력 향상을 위해 가까이 한 영어 노래는 차치하고, 첫 스마트 기기였던 아이팟이나 그 후 구매한 아이패드 또한 광석이 아저씨의 노래로 가득 채웠다. 미국 생활 중 날벼락 같은 故 노무현 전 대통령님의 부고 소식을 접했을 때도 하루 종일 광석이 아저씨의 ‘타는 목마름으로’ ‘부치지 않은 편지’를 쓰며 울었다. 매년 오월의 함성이 돌아올 때마다, 우리 사회에 있어서는 안 될 인재가 발생할 때마다 광석이 아저씨의 노래로 슬퍼하고 기억하고 위로했다. 호기롭고 달콤한 시작이 무색할 만큼 씁쓸하고 비통하게 끝을 맺은 사랑을 떠나보내며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토해내기도 했다.
잠시 2004년의 2월 즈음으로 돌아가 본다. 대학이 정해졌고 등록금 납부가 끝났으며 총학생회에서 주최하는 ‘새로 배움터’까지 다녀온 이후였을 테다. 고등학교 졸업식을 마지막으로 서울을 떠나 인천으로 막 이사 왔던 이때는 그래서, 십 대 시절을 가득 채웠던 모든 것과 갑작스러운 작별을 한 시기였기도 하다. 앞자리가 2로 바뀐 새로운 십 대에 대한 설렘과 두려움, 걸어온 발자국이 그립고 가지 않은 길을 같이 할 동지의 부재가 무거웠던 그때, 고민을 토로할 이가 없었던 그곳에는 변함없이 광석이 아저씨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서른 즈음’의 이야기를. 삶을 산다는 것은 ‘내가 떠나온 것’이 아니지만 ‘매일 이별하며 사는’ 것임을 어렴풋하게 일깨워 준 아저씨는 서른이 됐을 때 다시 찾아오라며 덤덤히 노래를 마무리했다.
2014년 1월 1일의 달력이 시작되는 00시 01분의 새벽. 2024년 1월 1일의 어둠으로 이어진 00시 01분의 새벽. 2004년의 2월을 떠올리며, 나 혼자 맺었던 광석이 아저씨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마주한 「서른 즈음에」는 내가 빚어낸 각각의 십 년을 쓰다듬어주며 특유의 주름이 해학스럽고 서글픈 웃음을 건네주었다. 그러했는가. 그렇게 또 떠나가고 떠나왔는가. ‘떠나간 내 사랑’이 어디 있는지 이제는 모르겠구나. ‘조금씩 잊혀져 가’며 ‘또 하루 멀어져 가는가.’ 광석이 아저씨의 덤덤한 위로를 품에 안은 나는, 그리하여 나는 또다시, 2034년 1월 1일의 어떤 새벽이 될지 모를 00시 01분을 기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