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하다

일상기록

by 글멋지기

위인전의 시대에 태어나 자라왔다. 지금도 독서가 가능한 아이들에게 위인전을 읽히는 부모가 많은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나와 같은 시대를 공유한 사람들의 어린 시절을 채운 것 중 하나는 위인전이다. (방문판매의 뜻을 처음 배우게 된 것도 위인전 세트를 판매하러 온 어떤 아저씨 덕분이었다) 국내 위인전과 세계 위인전을 독파한, 어느 정도 머리가 굵어진 십 대 청소년은 이윽고 위인전 한 권 한 권의 제목을 차지했던 영웅들이 떼를 지어 나오는 역사책을 읽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훌륭한 이야기는 수능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소홀히 하는 당시 교육 풍토의 이상함을 잠시 접어두면, 옆 나라 거대한 땅덩어리에서 명멸해간 영웅들과 또 옆 섬나라의 특정 시기에 활약했던 영웅들의 이야기가 일상을 차지했다. 삼국지가 그러했고 수호전이 또한 그러했다.(삼국지를 읽지 않는 사람과 친하게 지내지 말라는 신문광고까지 등장했었다)


이러한 이야기에 사회 전체가, 여러 세대가 호응하고 열광했음은 분명한 사실이고, 그것을 설명하는 이유는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띤다. 전적으로 경험 측면에서 살펴보면 이야기 속 영웅들이 추구하고 경주했던, 그리하여 누군가는 결국 이뤄내고 누군가는 석패의 눈물을 흘리고 누군가는 안타까운 좌절의 탄식을 내뱉었던 무언가가 나를 포함한 당시 사회를 흔들고 울렸기 때문이리라. 무언가는 다시 여러 갈래로 분화하여 누구는 이상이라 누구는 야심이라 누구는 대의라 누구는 꿈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너무나 먼 시간적 거리로 인해 물리적 모습을 지금은 찾아볼 수 없지만, 구전을 통해 남아 있는 유물과 유적과 기록을 통해 문화적인 모습은 사라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또한 이 이야기의 유산은 서양의 그것과 만나 유기적인 결합을 통해 새로운 모습을 입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 눈앞에 다시 태어나는지와 상관없이 저변에 깔린 척추뼈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구는 이상이라 누구는 대의라 누구는 꿈이라고 해석하는 무언가를 추구하고 경주하는, 그리하여 누군가는 이뤄내고 누군가는 좌절하는 이야기는 변하지 않고 곧게 서 있다.


그것은 찬란함이다. 그들이 보여준 행위의 찬란함과 그들이 가져온 새 시대를 살아갈 이들에게 찾아올 찬란함과 역사에 단단히 새겨져 영속하게 될 찬란함이 한데 모여 빛을 퍼트리는 찬란함이다. 시대의 격랑을 거스르는 첫발을 내디딘 영웅의 찬란한 발걸음이며 뒤를 이어 함께 걸어간 절대다수의 찬란한 어깨동무이기도 하다. 그것은 또한 함께 휘감겨 부러지지 않을 단단한 줄기를 만들어내고 이윽고 찬란한 꽃과 열매를 피워내고 우리는 그 과실이 만들어내는 시대를 살아가며 각자의 찬란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민주화의 피가 흐르고 이어진 황금기도 잠시, 나라를 뒤흔든 IMF 사태가 발생하고, 미국 발 금융위기를 타고 생겨난 헬조선의 시대를 겪어냈다. 생때같은 목숨이 한순간에 꺾여나가는 일이 거듭 발생하는 시간을 현재인으로서 목격했고 분노했으나 침묵하며 살고 있다. 한쪽에서는 세대를 멋대로 규정하여 그들의 재화를 팔아먹을 타깃으로 삼는 와중 상당수의 해당 타깃은 점점이 젖어드는 영향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규정된 세대 간의 차이를 차별로 인지하여 그것을 무기 삼아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고 있다. 사회 전체 수준에서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한 주제에 이분법적 사고로 편을 나눠 자기가 속한 편의 승리만을 추구하는 사회는 점차 두께가 두꺼워져 혁파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아래부터 위까지, 왼쪽에서 오른쪽까지, 다시 위에서 아래까지 하나로 뭉쳐 찬란한 영웅의 첫 발걸음을 따라 어깨동무 굳건하게 걸어갔던 찬란한 발자국이 보이지 않는다. 겨울이 깊은 어느 날의 밤 아래 일렁이는 저 먼 곳의 수평선처럼 계속해서 어둠 속으로 사라져만 가고 있다. 텁텁한 뜨거움에 그르렁거릴지언정 이육사 선생의 외침을 목구멍 속에 가득 담아 매일의 하늘에 뱉어야 한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오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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