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관해서라면 나도 빠지지 않는 사람이다. 성인이 되고 처음으로 술을 마셨을 때, 자연스럽게 아빠가 떠올랐다. 술과 술자리를 좋아하는 아빠. 한 번도 누군가에게 말한 적 없지만, 한때 내가 소주 빨간 뚜껑만을 찾았던 것도 아빠를 따라 한 거다. 아빠는 늘 빨간 뚜껑을 고집했다. “빨간 거 한 병 주세요.” 난 그 한마디가 뭔가 술을 주도하는 사람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센 척으로 보이든, 허세로 보이든, 술꾼처럼 보이든, 나도 그 말을 따라 술을 시키는 친구들에게 “난 빨간 거.”라고 말하고는 했다. 10대 마지막이나 스무 살쯤에 부모님에게 술을 배우는 게 좋다고 하던데, 난 그 시절에 아빠와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인 적은 없어도 은연중에 아빠에게서 술을 배운 거랑 다름없다.
처음 술이라는 존재를 알게 된 건 분명 아빠 덕분이었다. 아빠는 부끄러워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어렸을 때부터 아빠는 곧잘 술에 취해 집에 들어오곤 했다. 아빠가 회사원일 때도, 사장님일 때도, 백수였을 때도, 나이가 들어서도. 딱 한 시기, 마라톤을 열정적으로 하던 때를 제외하고는 아빠의 ‘술 생활’은 꾸준히 이어졌다. 어쩌면 마라톤은 아빠가 술을 잠시 잊기 위해 했던 대체제였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아빠가 술에 취해 현관문 앞에 대자로 뻗어 있던 적이 있다. 엄마는 굉장히 화가 나 있었지만, 그때의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싫다기보다는 궁금했다. 술이라는 것이 무엇이길래 어른들은 이렇게 스스로를 힘들게 만드는 걸까? 엄마는 왜 저렇게 화가 나 있는 걸까? 술을 마시면 다 저렇게 되는 걸까? 어른이 된다는 건, 술에 취해 힘없이 누워 있는 모습과도 연관이 있는 건가?
어렸을 때 아빠를 비롯한 삼촌들, 그리고 내가 만난 대부분의 아저씨는 술을 마시고 나면 기분이 좋아 보였다. 술이 들어가면 다들 한층 부드러워지고, 말을 걸어오고, 때로는 내게 용돈을 쥐여 주기도 했다. 어찌 보면 술 세계는 내게 호의적인 공간이었다. 어릴 때부터 술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보다는 막연한 동경의 세계로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성인이 되어 직접 술을 마시게 되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아빠를 떠올렸다. 나도 아빠처럼 술과 가까운 사람이 되었고, 나만의 술자리를 만들어 술에 취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즐기게 됐다. 아빠의 영향을 받았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런데 술에 관해 아빠와 나 사이에는 결정적인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차이점은 술자리에서의 태도다. 나는 술을 마실수록 기분이 들떠 목소리가 커지고 신이 나는 반면, 아빠는 점점 더 차분해진다. 아빠는 술이 들어가면 오히려 차분하게 가라앉는 타입이다. 그런데 또 재미있는 건, 나도 집에 들어가면 아빠처럼 차분해진다는 것이다. 엄마는 한 번 “왜 그렇게 무게를 잡느냐”며 나를 핀잔 준 적도 있었다.
이것이 아빠와 나의 공통점이다. 아빠는 술자리에서도, 집에서도 늘 차분하고, 나는 술자리에서는 활기차지만 집에 들어오면 조용해진다. 결국 우리는 둘 다 최종적으로 텐션이 떨어진다는 점에서 비슷한 사람들인 것이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뒤, 나는 술 마시는 아빠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거의 매일 술을 마시는 아빠의 모습이 예전과 다르게 보였다. 술이 아빠를 좀 먹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생겼다. 나 또한 술을 달고 살았기 때문에 아빠에게 술을 그만 마시라고 할 자격은 없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빠는 주말마다 소주 한 병을 비우곤 한다. 이것 또한 꾸준함이라면 꾸준함이다. 마시지 말라고 설득하는 게 의미가 없을 정도로, 아빠는 한결같다.
가끔 내가 아빠에게 술에 대해 무슨 말을 하면, 아빠는 대답을 피하거나 듣기 싫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럴 때면 나는 잠시 멈춘다. 말해도 소용이 없을 때가 많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나는 딸이다. 딸이기에 아빠가 걱정된다. 아빠가 아프거나, 술로 인해 기억을 잃거나, 건강이 나빠지지 않을까 두렵다. 술 때문에 모든 것이 잘못되는 건 싫다.
나는 묘하게 이중적인 감정을 느낀다. 아빠가 술을 안 마시면 오히려 이상할 것 같다. 오랫동안 이어진 그 주말 습관이 사라진다면, 나와 아빠 사이에 술로 이어지던 그 많은 대화와 이야기가 멈춰버릴 것만 같다. 알딸딸하게 취한 상태에서 나누는 이야기들이 우리 사이에 있으니까. 그 어색하게 진솔한 순간들, 가끔은 그것 때문에 내가 아빠를 더 이해하게 되는 것 같은 기분이다.
기억나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어느 날, 아빠는 오래전 자신이 죽으려고 했었다는 얘기를 툭 꺼낸 적이 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덜컥 겁이 났다. 아빠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걸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막상 그 이야기를 들으니 머리가 하얘졌다.
“그래서 어떻게 하려고 했는데? 어디 높은 데서 떨어지려고 했어?” 나는 두려운 마음에 이렇게 물었다.
아빠는 한숨을 쉬듯이 웃었다. 그러고는 말했다. “실패했지.” 소주를 계속 마시면 죽겠지 싶어서, 일하던 공장 식당에서 밤새 술을 마셨단다. 그런데 술이 하나도 취하지 않아서 그냥 아침이 되었고, 그날도 멀쩡히 일하러 갔다는 것이다.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 순간,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빠가 그런 마음을 품었던 게 가슴 아프면서도, 살아준 게 고마웠다. 함께 죽음을 넘기고 지금 여기까지 온 아빠와 내가, 그날의 이야기를 나누며 웃는다는 것이 조금 이상하고 기이하기도 했다. 결국 나는 같이 웃고 말았다. 어쩌면 웃음은 우리가 서로에게 가장 편안하게 내보일 수 있는 방어막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뭐야 그게… 이제 그런 생각 안 하지?”
그러면서 속으로 ‘그때부터 아빠에게 숙취가 없어진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 나도 나다.
아빠는 여전히 술을 마신다. 소주 한 잔이 인생의 고비를 넘기게 해준 사람처럼. 주말마다 술을 마시고도 일찍 일어나 청소기를 돌리고, 부엌에서 아침을 차리는 아빠의 모습, 그 평범한 주말 아침은 어쩌면 우리 가족을 이어주는 방식이 되었다.
아빠를 위해서라도 소주 빨간 뚜껑이 절대 단종되지 않기를 바라본다. 아빠의 주말 루틴 속에서 빨간 뚜껑 소주가 아빠의 삶을 지탱해 주는 작은 의식일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아빠는 소주 한잔이라는 작은 의식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덮기도 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힘을 얻는 것 같다.
그러면서 나는 생각한다. 아빠에게 술이 사라지면, 그가 정말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술은 아빠의 힘든 순간을 견디게 해준 도구였을 테지만, 이제는 더 나은 방식으로 아빠가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도 있다. 술 없이도 아빠가 자유로운 사람일 수 있기를 바란다. 아니, 술이 아닌 마라톤만큼 아빠를 자유롭게 만드는 무언가를 찾아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