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65세가 되던 해. 국가가 인정하는 ‘노인’이 된다고 아빠는 생각보다 신나 했다. 대체 뭐가 그렇게 좋은 걸까 싶었는데, 아빠가 기대한 건 경로 우대 교통 카드였다. 사람들은 대개 노인이 되는 걸 싫어하지 않나? 아빠는 늘 젊게 살고 싶어 했어서 슬슬 나이가 드는 걸 받아들이기 싫어할 줄 알았다. 하지만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마치 새로운 자유를 얻게 된 것처럼, “이제 지하철을 마음껏 타고 다닐 수 있다”며 기뻐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난 ‘역시 아빠는 한량 팔자인 건가’라는 생각을 몰래 했다.
아빠를 생각하면 참 독특하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냥 독특한 게 아니다. 아빠는 아주 자유분방하고, 틀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다. 특히 어느 날이든 가만히 있는 법이 없다. 늘 어디론가 떠나려고 하거나 실제로 떠나기까지 했던 아빠. 그 성질은 지금도 여전하다. 경기도 끝자락에 살면서도 아빠는 시간만 나면 지하철을 타고 서울로 나간다. 기차 타고 멀리 여행을 떠나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아빠가 제일 좋아하는 곳은 서울의 중심, 종로다. 아빠에게 종로는 마치 놀이터 같다. 내가 아빠 나이가 되면 나도 종로를 그렇게 자주 찾을까? 언제나 종로에 가면 아빠가 꼭 들리는 곳이 있다. 광장 시장에서 육회에 막걸리를 마시기, 남대문 시장 구경 후 갈치조림 먹기(요즘엔 맛이 변했다며 가지 않는다), 이따금 칼국수 한 그릇으로 점심을 해결하기. 시장에서 혼밥, 혼술하는 아빠의 모습을 처음에는 왠지 서글프게 느꼈다. 혼자서 밥을 먹고 술을 마시는 모습을 상상하니 누군가에겐 아빠가 좀 외로워 보일 것만 같았다. 하지만 요즘은 그게 오히려 아빠다운 모습이라는 걸 인정하게 됐다. 혼자서 누리는 그 시간이 아빠에게는 즐겁고 의미 있는 시간이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빤 서울에 나갈 때 그 누구와도 함께하지 않는다. 그저 홀로 다니는 그 자유를 마음껏 만끽한다.
아빠는 매주 주말이면 나와 비누가 있는 집으로 오거나, 아니면 혼자서 종로로 나가 맛집을 찾아다닌다. 서울에 나갈 때는 언제나 혼자다. 지난주에도 아빠는 면발이 탱글탱글한 칼국수 집에 다녀왔다고 자랑했다.
면발이 쫀쫀하네~
만두가 맛있다
서울의 이름난 맛집이라 해서 아침 일찍 올라왔네~
-아빠의 칼국수집 평
서점 구경도 아빠의 소소한 취미다. 라디오나 TV에서 들었던 책 제목을 메모해 두고, 시간이 나면 광화문 교보문고에 가서 그 책들을 사 온다. 책을 사는 일은 아빠의 아주 가끔의 작고 단순한 기쁨이다. 그리고 나에게도 이따금 책을 사주곤 했다. 아빠가 건네주는 책은 참 다양하다. 어떤 날은 기업 성공기를 담은 자기계발서를, 또 어떤 날은 에세이나 시집을 건넨다. 나를 위한 책이면서도, 아빠 자신이 읽고 싶었던 책이기도 하다. 아빠는 책을 통해 세상과 자신을 발견할 줄 아는 사람이다. 가끔 아빠가 문학을 공부했더라면 어땠을까 상상해 본다. 덕후 기질에 성실함까지 갖춘 아빠라면 분명 시집 한 권쯤은 거뜬히 낼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내겐 너무 자유로운 아빠.
아빠가 가족을 내팽개친 적은 없지만, 언제나 가족에게서 살짝 벗어나 있으려는 그 붕 뜬 느낌이 있었다. 아빠는 가족과 함께 있는 동시에, 가족 바깥의 세상과 자신만의 시간을 즐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모습이 어릴 때는 마치 언제라도 가족을 떠나가 버릴 사람처럼 느껴졌다. 언제든 가방을 싸고 훌쩍 떠나버릴 것만 같은 불안함. 그런 아빠가 한편으론 가깝고, 한편으론 멀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그 자유로움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요즘 아빠에게 새로운 제안을 하곤 한다. “아빠, 글 한번 써보는 거 어때?” 또는 “유튜브로 영상 찍어봐, 혼자 떠돌아다니는 얘기들 영상으로 만들면 재밌을 것 같아.” 아빠가 자유롭게 살아온 시간들을 글이나 영상으로 남겨보라고 제안하는 이유는, 아빠의 삶이 이제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내가 그 자유로움을 처음으로 제대로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빠는 그 누구보다 스스로의 삶을 기록할 만한 사람이었다. 그의 이야기, 그의 경험, 그리고 그가 바라보는 세상. 그 모든 것을 담아내면 분명 사람들에게도 큰 감동을 줄 수 있을 거로 생각한다.
그런데도 가끔 생각한다. 왜 아빠는 벌써 70살이지? 70살이라니, 너무 늦은 게 아닐까? 하지만 이내 다시 생각한다. 70부터 시작하면 어때서? 아빠는 여전히 자유롭고, 그 자유로움은 아마도 그의 나이와 상관없이 계속될 것이다.
요즘 아빠는 요리에 푹 빠져 있다. 아빠는 자신이 담근 고추장아찌 과정을 약 20분짜리 영상으로 남겨 슬며시 가족 톡방에 올려놓았다. 직접적으로 편집해달라고 말하진 않았으나, 나는 멋진 쇼츠 영상으로 편집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아직도 그 영상을 편집하지 못한 채로 놔두고 있다. 내친김에 아빠에게 편집을 배워보라고 할까? 결코 귀찮아서는 아니다.
아빠의 자유로운 모습은 이제 기록으로 남아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그의 자유를 따라가기에 벅차다. 아빠의 자유로움이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일까?
아빠는 요리하면서도 자유롭고, 여행하면서도 자유롭다. 책을 읽으면서도 자유롭고, 혼자 길을 떠돌아다니며 서울의 구석구석을 누비면서도 자유롭다. 그 자유로움이 어디서 끝나는지 나조차도 알 수 없을 만큼, 아빠는 늘 새로운 것을 찾아 떠난다. 그 자유로움 속에서 아빠는 나름의 행복을 찾아가고 있다.
때론 아빠의 자유로움이 부러울 때도 있다.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도 언제나 자신의 시간을 가졌던 아빠, 그리고 그 시간을 스스로 즐기며 살아가는 아빠. 나는 갈수록 아빠만큼 자유롭지 못하다. 어쩌면 그래서 아빠가 더 특별하게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추구하는 자유는 내가 아직도 배워야 할 것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이제 아빠의 이야기를 글이나 영상으로 남기는 건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싶다. 아빠는 자신을 기록하지 않는 대신, 주말마다 나에게 그 자유로운 시간을 전해주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그 시간을 조금씩 받아들이고, 나만의 방식으로 기록하고 싶다. 아빠가 주는 그 특별한 자유로움, 그 끝을 알 수 없는 아빠의 여정이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