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삼 남매 중 막내로 경기도 부천에서 태어났다. 당시 세무 공무원이었던 할아버지 덕분에 집안에는 언제나 흰 쌀밥과 먹을 것이 풍족했다.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아빠는 늘 배고픔을 몰랐다고 했다. 오히려 그 넉넉함을 주변에 나누며 살았던 기억을 자주 이야기하곤 했다. 이웃들에게 흰쌀을 나눠주던 일, 어려운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베푸는 일이 익숙했던 모습들. 어쩌면 아빠가 타인에게 늘 후하게 대하는 습관도 그때부터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아빠는 하얀 포메라니안도 키워봤다고 했다. 어려운 시절에 공무원 집안에 들어온 선물은 돈 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선물로 받은 강아지를 키웠다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아빠의 특별한 가정 환경을 보여준다. 나는 그 이야기가 조금은 낯설게 들리면서도, 아빠가 어려운 상황에 부닥쳤을 때 가끔은 다소 서툴렀고, 그저 우아하고 싶어 했던 이유를 조금은 짐작하게 됐다. 아빠는 힘든 상황에서도 어린 시절의 여유와 품위를 지키고 싶어 했던 것이다.
나 또한 부족함 없는 유년 시절을 보냈다. 특히 어릴 적에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영어, 피아노, 수영, 논술, 한자, 서예, 미술, 바둑, 태권도, 웅변, 바이올린까지. 지금 생각해 보면 나름대로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것이 분명하다. 아니, 부유한 정도가 아니라 아주 풍족한 삶이었다. 서울이 아닌 곳에서 자랐지만, 내가 자란 그곳에서는 누구보다 풍족한 생활을 누렸다. 우리는 옷을 사러 (지금은 사라진) LG백화점에 갔고, 주말이나 방학마다 멀리 리조트로 여행을 다니며, 외식도 자주 하곤 했다. 내 어린 시절은 늘 부족함이 없었다.
한때 내가 여러 가지 교육 혜택을 받은 건 엄마의 치맛바람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교육열에 휩싸여 나를 여러 가지 학원에 보내고, 다양한 예체능 수업을 듣게 한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은, 이 모든 것이 사실 아빠의 강한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어느 날 아빠가 말했다. 어릴 적, 같은 반 친구가 바이올린을 켜는 모습을 보고 무척 부러웠다고. 아빠는 어릴 적 기계 체조를 한 터라 단단한 몸을 갖게 되었지만, 그 섬세하고 우아한 바이올린의 몸짓(?)이 더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아빠는 딸인 내가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누리며 살기를 바랐던 것이다.
아쉽게도 나는 음악적 재능이 없었다. 바이올린을 아무리 연습해도 손가락은 뻣뻣했고, 음을 맞추는 것도 너무 어려웠다. 아빠는 조금 아쉬워했을까? 그래도 아빠는 포기하지 않았다. 늘 우리에게 무언가를 배우게 하려고 노력했다. 초등학생 때 중학교 영어 교재를 사와 읽도록 하거나, 한자 사전 같은 걸 눈에 보이는 곳에 두기도 했다. 교육의 열정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물론 엄마 또한 우리를 ‘가르치기 위한’ 욕망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특히 엄마는 학생 때 짝꿍이 문방구 딸이었던 게 그렇게 부러웠다고 했다. 엄마가 나고 자란 시골 동네에서는 책을 파는 유일한 장소가 문방구였기 때문이다. 만화책 한 페이지라도 읽어보려면 친구에게 온갖 아양을 떨어야 했던 엄마는 오직 우리에게 책을 읽히기 위해 당시 여러 장르의 전집을 판매하던 W출판사 영업사원으로 일했다. 거기서 일하면 전집을 직원가로 살 수 있었다. 동생은 몰라도 나는 그때 집에 잔뜩 쌓여 있던 전집을 끊임없이 반복해 읽었던 행복한 기억이 남아 있다.)
어쨌든,
하지만.
아빠에게서 내가 진정으로 배운 것은 바이올린이나 바둑이 아니었다. 가장 깊이 새겨진 배움은 죽음에 대한 것이다. 아빠와 나는 수많은 무덤을 함께 만들었다. 거북이 두 마리, 토끼 두 마리, 그리고 인천 바다에 뿌려진 친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엄마.
어렸을 때 나는 동물을 통해 죽음을 배웠다. 그 첫 교훈은 아빠를 통해 시작됐다. 피아노 위에 올려놓고 키우던 거북이 두 마리와 아빠가 데려온 토끼 두 마리는 너무나 연약한 생명체들이었다. 거북이는 그나마 몇 개월을 살았고 우리는 거북이를 뒷산에 묻었다. 그때 우리 집은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를 겪고 있었고, 반지하 집으로 이사한 상태였다. 엄마는 안 그래도 습한 집에 냄새 나는 동물을 들이는 걸 탐탁지 않아 했지만, 나는 그 거북이를 나름 정성스럽게 키웠다. 물론, 물을 제때 갈아주지도 못했고, 키우는 방법도 잘 몰랐지만 말이다.
토끼는 나와 동생이 며칠을 졸라 아빠가 결국 사다 주신 것이었다. 아빠는 늘 우리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해주고 싶어 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작은 아기 토끼들은 너무나 연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걸 알지도 못하고 알아볼 생각조차 안 했던 개념 없는 나와 동생은 토끼들을 자랑하고 싶어 밖에 데리고 나가고, 만지며, 스트레스를 주었다. 결국 토끼는 일주일도 채 살지 못하고 죽었다.
죽음이란 개념이 없던 나는 오히려 우리가 “혼나게 될까 봐” 걱정했다. 그래서 동생과 함께 죽은 토끼를 산에 버리고 돌아왔다.
그날 밤. 집에 돌아온 아빠는 처음으로 화를 냈다. 아빠는 화가 나면 오히려 차분해지고 말이 없어진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동생을 데리고 한밤중에 다시 산에 올라간 아빠는 버려진 토끼 두 마리를 찾아 다시 집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우리는 거북이를 묻은 곳 근처에 토끼들을 조심스럽게 묻었다. 나는 처음으로 죽음이란 것이 얼마나 정성스럽고 진지한 일인지를 깨달았다. 그것이 나의 첫 번째 죽음에 대한 기억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신 외할머니. 그때 엄마는 우리를 친한 친구에게 맡기고 홀로 외할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오셨다. 나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았고, 그것이 죽음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그래서 일기장에 그저 대충 기록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 보고 싶어요… 교과서적인 문장으로 채운 식이었다.
얼마 뒤 아빠는 그 일기장을 펼쳐보고 나를 나무랐다. “너무한 거 아니냐”며 흐느끼듯 말하는 아빠의 모습과 아무 말 없는 엄마의 모습. 그 묘한 공기가 여전히 기억난다. 나는 깨달았다. 죽음은 그저 몇 줄 문장으로 대신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빠의 말은 나에게 죽음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그 후로 나에게 죽음이란, 훨씬 진지한 부분으로 자라났다.
아빠는 부유한 집안의 막내아들로 자랐고, 늘 우리에게 세련된 것들을 가르치고 싶어 했다. 피아노, 바이올린, 바둑 같은 우아한 것들을 물려주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내가 진정으로 아빠에게서 배운 것은 감수성인 것 같다. 죽음을 대하는 태도, 떠나보내는 마음. 내가 끊임없이 화두로 삼고 있는 대부분의 감성은 그때 아빠의 가르침을 통해 만들어진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