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주말 루틴 중 하나는 채널 9번이다. 토요일 이른 저녁이 다가오면 늘 9번이 틀어져 있다. 그 시간대에 9번에서는 언제나 휴먼 다큐멘터리가 나온다. 안타까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밀착 취재하고 도움을 주는 다큐와 중년의 연예인이 골목을 돌아다니며 동네와 사연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연달아 보는 루틴이다. 누군가의 기구한 사연, 안타깝기 그지없는 상황들, 때로는 감동적이고 때로는 화도 나는 여러 이야기가 화면에 등장하면, 아빠는 금세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빠가 눈물 버튼이 눌리는 그 순간마다 나는 아빠를 쳐다보며 놀리기 일쑤였다.
“또 울어어~”
요즘은 스포츠 채널을 틀어 놓거나 유튜브 영상을 더 많이 보는 아빠라서 ‘채널 9번 루틴’은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지만 나에게 아빠는 ‘울보’ 이미지가 강하다.
특히 아빠는 다른 사람의 작은 불행이나 고통을 마치 자기 일처럼 가슴 아파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아빠를 보며 나는 오래전부터 복잡한 감정이 일곤 했다. 우
리 집이 더 가난한데. 우리 엄마가 더 아픈데. 우리도 충분히 힘들고 어려운데. 대체 아빠는 왜 남들의 아픔에만 이렇게 감정이입을 하는 걸까? 그래서 가끔은 날 선 말을 한 적도 있다.
“아빠, 우리가 더 불쌍해. 우리나 신경 써.” 그러고 나면 내 마음도 어쩔 도리 없이 아픈 걸 알면서도 나도 나대로 서운함이 폭발하곤 했다.
어릴 때 사업이 부도가 나면서 아빠가 집에 잘 들어오지 못하고 여기저기를 떠돌 때, 아빠는 뜬금없이 나와 동생을 불러낸 적이 가끔 있었다. 야구장 한구석, 지하철 플랫폼, 동네 상가의 복도 같은 곳에서 우리는 아빠를 만났다. 마치 스파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우리는 덩달아 주변 눈치를 봐야 했다.
아빠는 어정쩡한 그곳에서 멀뚱히 서 있는 나와 동생을 붙잡고 훌쩍이곤 했다. 사실 훌쩍이는 정도가 아니라 엉엉 운 적도 있다. 어린 나와 동생은 왜 아빠가 우는지 알지 못했지만, 그저 아빠를 따라 같이 울 수밖에 없었다. 아빠의 눈물이 참 슬프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했다. 아직 어린 우리는 왜 같이 살던 아빠와 이렇게 떨어져 살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으니 답답함이 눈물로 터져 나왔다.
처음에는 잘 따라 울던 나였지만, 점점 울음이 나오지 않았다. 대체 아빠는 왜 이렇게 자주 우는 걸까? 라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채웠다. 아빠는 우리가 불쌍해서 우는 걸까, 아니면 해결되지 않는 현실이 슬픈 걸까? 그도 아니면 자신의 처지가 서글퍼서? 나는 그런 물음표들을 마음속에 품게 되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아빠의 울음을 그저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눈물을 참는 법을 배웠다. 내 안에도 울보가 있었을 텐데, 아빠가 눈물을 흘릴 때 나는 강해지는 법을 터득해야만 했다.
어느 날은 갑자기 전화가 왔다. 아빠가 나보고 지하철역으로 나오라고 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나가보니, 아빠는 치킨 한 봉지를 들고 있었다. 봉지 속에서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진한 치킨 냄새가 풍겼다. 아빠가 건넨 치킨은 방금 산 것인지 뜨겁기 그지없었고, 뜨거운 치킨 김이 손에 닿는 순간 기쁨보다는 슬픔이 더 커졌다. 왜 아빠는 선물조차 도둑처럼 줘야만 하는 걸까? 나는 그 치킨을 먹은 기억이 없다. 분명 가져가서 동생과 나눠 먹었을 텐데 먹은 기억은 귀신같이 사라지고 치킨을 건네받은 플랫폼의 풍경과 아빠의 실루엣만 진하게 남아 있다.
그날 이후로 아빠 또래의 아저씨들이 혼자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 괜히 가슴이 먹먹해지곤 했다. 그리고 치킨집 앞을 지나갈 때마다 아빠가 떠올랐다. 아빠는 그날 우리가 생각났겠지? 가게 앞을 지나가다가 치킨 냄새를 맡고는, 우리에게 사다 주고 싶었겠지? 없는 돈을 긁어모아 사 들고 와서는 동네에 잠시 들러 몰래 건네고 사라졌겠지. 아빠의 처지가 너무 안쓰러워 보였고, 그런 아빠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답답했다. 나의 10대 후반과 20대를 지배했던 어두운 감수성은 어쩌면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아빠와는 반대로, 엄마는 눈물이 없었다. 어려운 상황일수록 더욱 강인해지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늘 현실적인 대처법을 찾거나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 감정에 휘둘리진 않았다. 어쩌면 감정에 휘둘리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빠가 순두부처럼 부드럽고 여린 감정의 소유자라면, 엄마는 돌처럼 단단했다.
나는 그런 엄마와 아빠를 보면서 때로는 감정에 빠져드는 아빠가 아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순두부 같은 아빠.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함민복 시인의 시, <눈물은 왜 짠가>를 읽을 때면 시 속 주인공인 어머니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아빠를 떠올린다. 아빠의 눈물은 짤까? 아니면 그저 많기만 한 걸까?
지난 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 댁에 모셔다 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 시간도 있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설렁탕 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더운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고깃국물이라도 되게 먹어둬라.” 설렁탕에 다대기를 풀어 한 댓 숟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주인아저씨는 뭐 잘못된 게 있나 싶었던지 고개를 앞으로 빼고 의아해하며 다가왔습니다 어머니는 설렁탕에 소금을 너무 많이 풀어 짜서 그런다며 국물을 더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아저씨는 흔쾌히 국물을 더 갖다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주인아저씨가 안 보고 있다 싶어지자 내 투가리에 국물을 부어주셨습니다 나는 당황하여 주인아저씨를 흘금거리며 국물을 더 받았습니다 주인아저씨는 넌지시 우리 모자의 행동을 보고 애써 시선을 외면해 주는 게 역력했습니다 나는 국물을 그만 따르시라고 내 투가리로 어머니 투가리를 툭, 부딪쳤습니다 순간 투가리가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왜 그렇게 서럽게 들리던지 나는 울컥 치받치는 감정을 억제하려고 설렁탕에 만 밥과 깍두기를 마구 씹어 댔습니다 그러자 주인아저씨는 우리 모자가 미안한 마음 안 느끼게 조심, 다가와 성냥갑만 한 깍두기 한 접시를 놓고 돌아서는 거 였습니다 일순, 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얼른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쳐내려 눈물을 땀인 양 만들어 놓고 나서, 아주 천천히 물수건으로 눈동자에서 난 땀을 씻어 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눈물은 왜 짠가
-함민복, "눈물은 왜 짠가",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내 기억으로는 아빠의 눈물은 짜다기보다, 잔에 넘쳐흐르는 소주 같다. 감정을 담아내는 잔이 차오르다 못해 넘쳐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내가 기억하는 아빠는 아이처럼 자주 울던 사람이었다. 슬픈 다큐멘터리나 드라마를 보며 훌쩍이는 아빠의 모습이 지금은 우리 가족만의 웃음 포인트가 되어버렸지만, 사실 나는 여전히 아빠의 눈물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니까 그냥 웃어버리고 만다.
아빠의 눈물은 나에게 눈물을 참고 견디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나는 점점 눈물을 참는 사람이 되어갔고 눈물을 참으며 그저 강해지려고만 애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다. 눈물을 참는 것만으로는 내 마음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눈물은 흘러야 한다는 것을.
요즘 나는 아빠를 닮아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아마 나이가 들수록 울보가 되는 법을 배우는 중일지도 모른다. 눈물을 참기보다는 터뜨리며 그 울음 속에서 내 안의 감정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고 싶다. 또한, 다만 한 가지를 다르게 하고 싶다. 기쁜 울음만 가득한 삶을 살아보고 싶다. 아빠의 눈물이 내가 견딜 힘이 되어주었다면, 나의 울음은 내가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