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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쌤 Oct 23. 2024

열 한 번째 주말, 아빠 사라지다

나는 참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매주 수영장에 가고, 피아노와 미술을 배우며 일주일이 바쁘게 흘러갔다. 우리 가족은 늘 풍족했고, 아빠는 나에게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곤 했다. 아빠가 우리 곁에 있었을 때는 모든 게 가능할 것만 같았다. 아빠는 단 한 번도 우리에게 큰 소리를 내지도 않았으며 교과서에 나오는 자상한 아버지상 그 자체였다. 버팀목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그런 가장이었다.


그러나 우리 집은 갑작스럽게, 아니 어떻게 보면 예견되어 있었다는 듯이 서서히 무너졌다. 오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뒤 IMF 시절에 맞물려 시작한 아빠의 사업이 실패로 돌아가고 아빠는 정신없이 무너져 내렸다. 실패라는 걸 생각해 본 적 없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어린 우리는 홍수에 떠내려가는 사람들처럼 그저 흘러가기만 했다. 엄마와 아빠는 혼신을 다해 헤엄쳤겠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리 집이었던 집을 팔고 떠나야 했을 때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따라나섰으나 사실 몇 번을 그 집에 갔었다. IMF 시절이 대부분 그랬겠지만 똥값에 팔려나간 집에 곧바로 입주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텅 빈 집들이 유난히 많았던 시절이다. 


문도 제대로 잠겨 있지 않는 한때 우리 집이었던 집 문을 열고, 널려 있는 쓰레기 중에 내 물건이 있나 살펴보고 오기를 몇 번 반복하면서 난 ‘나중에 꼭 122동에 살아야지’ 라는 어린 생각도 했다. 원래 우리 집은 122동이니까. 어디든 122동에서만 살면 우리 집으로 돌아오는 기분이 들 것만 같았다. 그리고 초등학교 1학년 때 친구들이 놀자고 외치던 베란다를 하염없이 바라봤던 것이 마지막 우리 집 방문이었다.


우리가 처음으로 이사한 곳은 반지하 빌라였다. 아파트였던 우리 집보다 방이 커져서 나랑 동생은 그런대로 신나 했다. 그리고 창밖으로 사람 다리나 고양이가 보이는 것을 꽤나 신기해했던 기억이다. 천장과 벽에 곰팡이가 서려 있는 게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그곳에서 아빠와 우리는 여전히 함께 지냈다. 아빠와 영화 <매트릭스>를 빌려다 본 기억도 나고, 유일한 오락거리인 컴퓨터로 DDR을 연결해 놀기도 했다. 말 그대로 ‘할 건 다 했다’. 아파트에서 대부분의 짐은 버렸지만 끝까지 사수한 나의 피아노를 치며 노래 부르던 기억도 난다.


그러면서도 우리 가족의 삶은 이전과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집은 어둡고 좁았으며, 빛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심지어 나중엔 도둑이 들었고, 나름대로 평화로운 나날 중에 갑작스럽게 외할머니까지 돌아가셨다. 어려운 일이 연이어 벌어졌다. 


아직 홍수가 끝나지 않았던 걸까? 나와 동생은 그저 어린아이들이었다. 연년생인 우리 둘은 이제 막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새로운 학교로 진학할 때였지만 무엇을 기뻐해야 하고 기대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알 수가 없는 채로 나이를 먹어갔다.


아빠는 어느 순간 완전히 사라졌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명절만 되면, 엄마는 우리를 데리고 여전히 아빠의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향했다. 명절이면 아빠가 혹시 올까 하는 생각도 했는데 중간에 아빠를 큰집에서 본 기억은 없다. 아빠의 부재가 점점 익숙해졌고 아빠가 없다는 사실이 현실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나와 동생은 차츰 성장했다. 엄마는 우리에게 아빠의 존재가 여전히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임을 알려주려 했던 것 같다. 우리가 아빠를 완전히 잊지 않도록 말이다.


나도 동생도 엄마도 그 구석진 경기도의 작은 방에서 자라나며 몰락한 집안을 받아들여야 했다. 스마트폰도 없던 그 시절,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견디고,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엄마는 엄마대로 씩씩함을 잃지 않았다. 시골에서 도시까지 여러 풍파를 겪어 왔기에 엄마는 아파트만은 포기하고 싶지 않다며 월세살이라도 원래 우리가 살던 동네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나와 동생은 조금은 찐따 같은 시절을 보냈다. 약간의 반항기가 있기도 했고,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로 마냥 해맑고 평범하게 학교에 다니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그 시절의 나는 아빠가 남기고 간 것들을 헤아리기보다는, 내가 앞으로 쌓아가야 할 삶이 더 중요했다. 어쩌면 나는 이미 아빠가 우리 삶에서 서서히 멀어지고 있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삶을 즐기고 싶었다. 나도 동생도 여전히 놀기를 좋아하는 아이들이었으니까. 


한부모 가정이라는 이유로 우리는 학교에서 ‘차상위계층’으로 분류되었고, 급식비와 같은 이런저런 학교생활에 필요한 돈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당시에는 그 지원을 받기 위해 종례 시간에 손을 들거나, 특별히 신청서를 챙겨야 하는 절차가 필요했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런 절차가 전혀 창피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쭈뼛쭈뼛했던 순간도 물론 있었지만, 이게 우리가 살아가야 할 길이라는 생각이 들자 오히려 당당해졌다. 동네방네 떠벌릴 일은 아니래도 우리 가족에게 주어지는 당연한 권리라는 생각에 나는 신청서를 당당히 받아 챙겼고 손을 들라는 요청이 있을 때마다 망설임 없이 손을 들곤 했다. “저희 아빠가 없어서 지원받아야 해요!”


동생도 마찬가지였는지, 나랑 동생은 무척 가난하기만 했던 당시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이렇게 독립적인 성향으로 살게 되었다고 회상하고는 한다. 아빠 없이도 우리는 우리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운 것이다. 가난을 통과하는 법을, 고통보다는 삶을 똑바로 바라보는 법을 말이다.


아빠는 대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타임라인을 정확히 맞추기는 어렵지만, 나에게는 아빠가 땅속을 헤매는 개미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쉼 없이 움직이며 어딘가를 헤매는 아빠. 우리가 볼 수 없는 곳에서 끊임없이 걸어가고 있는 개미 같은 아빠의 모습이 그려졌다. 한참을 눈에 보이지 않다가, 문득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다시 나타나는 아빠. 개미는 어디든 집도 지을 수 있지 않은가.


우리가 단단하게 뿌리내리고 자라날 동안 아빠의 땅은 어디쯤이었을지. 그건 아빠의 기억 속에만 잠들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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