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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쌤 Oct 25. 2024

열 세 번째 주말, 교도소에서 온 편지

가끔씩 어둡고 텅 빈 방에 홀로 있을 때 그 기타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 나는 경악한다. 그러나 나의 감각들은 힘센 기억들을 품고 있다. 기타 소리가 멎으면 더듬더듬 나는 양초를 찾는다. 그렇다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가끔씩 어둡고 텅 빈 희망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 이상한 연주를 들으면서 어떨 때는 내 몸의 전부가 어둠 속에서 가볍게 튕겨지는 때도 있다.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는 푸른색이다.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

기형도, <입속의 검은 잎>,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중에서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아빠의 모습을 떠올린다. 아니 아빠라기보다는 ‘진형’에 가까운 한 사람을 말이다.


아빠는 사업에 실패하고 부도를 냈다. 어떻게든 책임을 질 방법을 찾아야 했는데, 아빠는 눈앞의 불안에서 도망쳤다. 더 큰 불안과 고독 속으로 스스로 내몰았다. 떠돌기를 선택한 아빠가 “어둡고 텅 빈 희망” 속을 걸어 다닐 때 어떤 마음이었을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변제 능력을 갖출 수 없었던 아빠는 결국 경제사범으로 몇 개월 정도 교도소 생활을 해야 했다. 당시 부도를 낸 크고 작은 사장님들이 많았다고는 얼핏 들었지만 당시 고3이었던 나에게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엄마는 최대한 우리에게 걱정하지 말라며 다독여주었지만, 성인이 되기 직전 나름의 치열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나는 아빠가 교도소에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아빠는 어린 시절부터 내게 늘 ‘어른의 상징’이었고, 언제나 다정하고 친절한 아빠였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떠들며 놀 때, 또는 글 쓰러 서울을 오가며 불쑥불쑥 “부모님이 교도소에 계신 친구가 또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빠의 부재는 공허감이나 그리움보다는 그저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대한 어색함으로 다가왔다.


문예창작학과 입시를 준비하며 문학소녀가 된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아빠에게 맞섰다. 그 방법은 바로 글쓰기였다. 아빠를 위해서, 엄마를 위해서, 우리 가족, 그리고 스스로에게 견딜 힘을 주리라는 마음가짐으로 백일장에 나갔다. 무언가 성취해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이 나를 지탱해 주고 있었다. 전국 방방곡곡 백일장을 다니며 크고 작은 상을 받아왔다. 상장은 물론 상금으로 받은 전자사전, MP3 같은 상품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글로 먹고 살 수 있다고 했잖아?”


시간이 흘러 엄마는 그때를 회상하며 나의 그런 성취들에 큰 위로를 받았다고 했다.


“그땐 나가기만 하면 상을 받아오는 거야.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까? 싶고, 진짜인가 싶고. 상 받았단 이야길 들으면 피곤하지도 않았어.”


사실 엄마의 기억은 거짓이다. 솔직히 나갔던 대회 횟수에 비하면 상 받은 건 손에 꼽을 정도다. 그렇지만 찜질방에서 야간 일을 하던 엄마에게는 내가 상을 탔다는 소식이 동력이 될 만큼 고된 하루하루를 보냈으리라. 새벽에 일하고, 낮에는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도 엄마는 늘 나의 소식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 무렵 내 소식을 기다리는 또 한 사람, 아빠가 있었다. 나는 교도소에 있는 아빠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편지라는 매체가 지금보다는 흔한 시대지만, 아빠에게 편지를 쓴다는 건 다소 낯선 일이었다. 그런데 막상 아빠에게 글을 쓰기 시작하자 묘한 안정감이 찾아왔다. 직접 대면해서 말하는 것보다 글로 소통하는 것이 훨씬 편했다. 편지를 통해 천천히 내 감정을 정리하고, 아빠에게 전할 이야기를 고르고 다듬을 수 있었다. 아빠도 내 글을 읽으며 내 생각과 감정을 어느 정도는 헤아려 주었으리라 믿었다. 


아마도 아빠는 만날 수 없는 공간에 있고, 편지로 소통하는 시절은 우리 부녀에게 행운이었다.


그 시간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만약 그때 내가 아빠와 곧바로 대면했다면. 얼굴을 마주 보고 이야기를 할 수나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또 대화하는 과정에서 서로 솔직해지지 못하고 감정이 엉켜버렸을지도 모른다. 분노와 미움이 마구 뒤섞인 상태로, 나도 모르게 불편한 감정들을 쏟아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편지라는 시간의 간격이 우리 사이에 놓여 있었기에 나는 아빠에게 내 마음을 전하는 동시에 내 감정을 정돈할 수 있었다.


아빠는 교도소 생활에서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일본어를 배우겠다며 얇은 옛날 편선지에 단어장을 만들었고, 책도 꾸준히 읽었다. 나중에 아빠가 교도소에서 보낸 편지에서 나는 그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책 속에서, 단어장 속에서, 아빠는 자신의 상처와 고독을 어루만지며 조금씩 자신을 회복해 나가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아빠에게 쓴 편지는 지금 사라졌다. 아빠는 그 편지들을 고이 간직했다고 했지만,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아마 먼지 속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지. 아빠가 내게 보내온 편지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 편지들 속에서 아빠는 늘 미안하다는 말, 엄마를 잘 챙기라는 말, 규칙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당부를 반복했다.


아빠에게 단 하나 남아 있는 내가 보낸 편지에서, 나는 아빠에게 “엄마와 화해하고 잘 지냈으면 한다”고 적었다. 지금의 나로서는 상상도 못 할 발언. 그 당시에는 그저 가족이 모두 함께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기에 해맑게 그런 부탁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엄마가 병이 악화되면서, 내 마음은 점점 아빠에 대한 미움과 원망으로 기울어 갔다.


나는 아주 자주, 아빠에게 투덜거리며 원망 섞인 말들을 쏟아내기 일쑤였다. 편지 속 이야기와 다르게 딸이 나이 들어갈수록 당신에게 모질게 대할 때 아빠는 어떤 마음이었을지 자꾸만 돌아보게 된다. 당시 아빠에게 보낸 다른 편지들 속에는 어떤 말들이 적혀 있을까. 짐작조차 안 되는 지금의 내가 너무 낯설게 느껴진다.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는 푸른색이다.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


내가 보내던 그 푸른 편지들이 아빠에게도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였을까? 교도소라는 차가운 공간 속에서도 아빠에게 푸른 희망을 심어줄 수 있었을까? 아무리 먼지가 내려앉아도 색을 잃지 않는 기형도 시인의 푸른 종이처럼, 아빠와 내가 주고받은 편지들은 아빠의 삶에 작은 위로가 되었을까?


천천히 편지를 주고받았던 그때의 속도대로 우리는 지내고 있다. 편지가 아닌 ‘주말’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말이다. 아빠가 혼자 자기만의 공간에서 스스로를 잃지 않으려는 모습은 여전히 그대로다. 나는 그런 아빠에게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주말의 시간을 조금 내어주고 서로를 배워가는 중이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에게 텅 빈 방 안에서 외로울 때마다 “낡은 악기”가 되어 이따금 편지로, 주말의 시간으로 남아 희망을 연주해 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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