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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쌤 Oct 16. 2024

여섯 번째 주말, 아빠만의 미슐랭 급 입맛 철학

아빠는 고기를 싫어한다. 삼겹살? 돼지갈비? 치킨? 이 세 가지는 아빠의 식탁에서 절대 찾아볼 수 없는 음식이다. 외식의 꽃이라 불리는 고기지만, 아빠는 절대 먹지 않는 음식이었다. 그냥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철저히 ‘거부’했다. 그나마 고기를 먹는다고 하면 아빠가 먹는 고기는 정해져 있다. 질 좋은 소고기를 숯불에 구운 것, 혹은 신선한 소고기 육회. 한마디로 비싼 고기다. 내장이나 곱창류는 물론이고, 고기에서 잡내가 조금이라도 나면 아빠는 젓가락을 탁 내려놓고 고갤 절레절레 흔든다.


그렇다면 아빠는 단백질을 어디서 얻느냐. 두부다. 두부는 아빠의 소울 푸드이자 필수품이다. 두부 말고도 콩으로 만든 음식이라면 무엇이든 좋아하는 아빠에게 정작 “두부가 최고죠?” 하고 물으면,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빠의 영혼을 지배하는 진정한 음식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 바로 칼국수다.


어릴 적, 아빠가 가장 신나게 외식을 하러 갔던 장소는 바로 칼국수집이었다. 아빠는 칼국수만 나오면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였고, 그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어찌나 자주 갔는지, 그 식당들의 위치와 내부 구조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할 정도다.


첫 번째로 기억나는 곳은, 지금은 사라진 닭칼국수집이다. 가게 근처에만 가도 진한 닭육수의 향기가 코끝을 자극하던 곳. 고기를 안 먹는 아빠도 그곳의 닭육수와 잘게 자른 닭고기 살이 들어간 칼국수는 특히나 좋아했다. 하지만 역시 고기는 우리 몫이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아빠는 면에만 집중하고, 그 칼국수에 들어간 고기는 죄다 나와 동생의 차지였다. 그러다 우리는 금세 배가 불러 대충 먹고 가게 앞에 있던 작은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며 아빠를 기다리곤 했다. 아빠의 칼국수에 대한 열정 덕분에 우리는 맛있는 고기를 잔뜩 먹을 수 있었다.


또 하나 기억나는 곳은 지금도 여전히 영업 중인 한 해물 칼국수집이다. 그곳은 가정집을 개조해 만든 식당으로, 집에 들어서면 거실과 방에 동그란 상이 군데군데 놓여 있었다. 아빠는 그곳에서 늘 보리밥부터 비벼 먹고, 칼국수를 기다렸다. 시원한 해물 육수에 면발이 탱글탱글한 칼국수는 아빠가 말하는 ‘면발의 정석’이었다. 겉절이도 정말 맛있었다. 지금은 건물을 올렸을 정도로 성장해 유명 맛집이 된 지 한참인데, 아빠는 갈 때마다 “맛이 예전 같지 않다”고 아쉬워하며 그때 그 맛을 그리워한다.


아빠가 말하는 칼국수의 핵심은 바로 면이다. 아빠는 면발의 탄력과 익힘 정도를 엄청 중요하게 여긴다. 아빠가 제일 좋아하는 면은 균일하지만 투박한 손맛이 담겨 있어야 한다. 면을 이야기할 때만큼은 아빠의 표정은 진심이다 못해 진지하다.


아빠가 좋아하던 칼국수집들이 하나둘씩 문을 닫거나 이사를 가면서, 혹은 너무 유명해져 발 디딜 틈이 없어지자, 아빠는 직접 면 반죽을 하기로 결심했다. 사실 예전에도 반죽하는 걸 좋아했지만, 나와 엄마는 아빠가 일을 벌이는 걸 번거롭게 여겼다. 커다란 스테인리스 그릇에 밀가루를 치대는 것도, 숙성하느라 오래 기다려야하는 것도. 뭐 뒤처리와 정리까지 아빠가 다 했지만, 그냥 일을 벌이는 것 같아 만류하기만 했던 것 같다. 우리는 “그냥 사 먹자”라고 자주 말했지만, 아빠는 주말마다 자신의 주방을 차지하며 반죽을 만들었다.


아빠의 반죽은 그저 단순한 요리가 아니다. 물의 온도, 밀가루의 상태, 반죽을 치대는 각도, 앉아 있는 위치까지 모든 것이 고려된다. 집 안 여기저기를 돌며 가장 적절한 반죽 장소를 찾아낸 뒤, 아빠는 본격적으로 면을 치대기 시작한다. 그리고 반죽을 숙성하는 과정도 굉장히 중요하다. 그래서 아빠의 면 요리에는 언제나 시간이 많이 들어간다. 하지만 그만큼 정성이 깃든다. 칼국수뿐만 아니다. 수제비, 만두피까지 아빠의 손에서 탄생했다.


만두 얘기가 나오니 생각나는 일이 있다. 나랑 가장 가까운 친구 둘은 ‘만두 귀신’이다. 전국에 맛있는 만두 맛집 지도를 만들어두고 도장깨기 하는 게 로망이며, 한 친구는 집에서 만드는 손만두에 진심이었다. 그런 부분에서 아빠와 죽이 척척 맞아, 우리는 어느 날 ‘만두 데이’를 열기로 했다. 아빠는 그 전날부터 설렘 가득한 표정으로 반죽을 치대기 시작했다. 혹시나 반죽이 모자랄까봐 시판 만두피까지 넉넉하게 준비하고 밀가루의 배합까지 신경쓰는 모습을 보며 반죽을 향한 아빠의 진심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친구 한 명은 집에서 가져온 커다란 찜기를 들고 왔다. 그 친구네 집은 제사를 1년에 여러 번 지내고 식구도 많아 한 번에 수십 개의 만두를 찔 수 있는 찜기가 있었다. 다른 친구는 술과 만두와 곁들일 여러 가지를 챙겨왔다. 곁들이는 술과 메뉴에 진심인 친구였다. 나는 그들을 환대했다. 모든 포지션이 완벽했다. 아빠는 만두피를 만들고, 우리는 만두를 빚고, 만드는 동시에 만두를 쪄내고, 소주를 곁들이며 몇 시간 동안의 만두 데이는 성공적으로 마무리 됐다. 그날 만든 만두의 절반 이상은 우리 뱃속으로 들어간 것 같다. “역시 만두피를 직접 만들면 다르네요!” 그 한 마디에 아빠의 ‘반죽 부심’은 한뼘 더 자라났다.


가끔씩 나는 생각한다. 아빠가 정성스럽게 만든 반죽을 장사를 해보는 건 어떨까? “아빠, 반죽 장사 한 번 해볼까?”라고 농담처럼 물어본 적도 있다. 하지만 아빠는 그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빠에게 반죽은 장사할 만한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본인의 까다로운 입맛을 충족시키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누군가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위한, 자신이 먹고 싶은 방식으로 정성스럽게 만드는 것. 아빠에게 면은 그만큼 자신을 이루는 한 부분이다.


그런데 이 까다로운 입맛이 나에게도 연결된 것을 깨닫게 된 건 요즘 들어서다. 나는 자신을 무던한 편이라고 생각했지만, 친구들은 나를 보고 “너도 꽤나 입맛이 까다로운 편이야”라고 지적했다. 떡볶이를 좋아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해, 식감이 부드러운 것보다 살아 있는 걸 좋아하며, 식거나 냉장고에 들어간 음식에는 손도 안 대는 등 이것저것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을 잘 골라내곤 한다. 아빠만큼이나 나 역시 음식에 대한 자기 주관이 뚜렷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예전엔 참 까탈스럽다고 느껴졌던 아빠의 모습이 이제는 스스로를 자신을 잘 돌보는 방법을 아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 하나에도 나의 취향을 반영하는 것은 아빠에게서 이어진 삶의 방식인 것이다.


어렸을 때 같은 동에 사는 친하게 지내는 가족들과 고깃집으로 외식을 자주 나섰던 기억이 있다. 아빠는 그때 어떻게 했던 걸까? 아마 아빠는 고기를 거의 먹지 않았고, 그저 된장찌개 한 그릇이나 냉면 같은 것으로 식사를 했을 것이다. 또는 회사 생활을 할 때는 어떻게 했을까? 지금도 그렇지만 회식은 고기집이 진리 아닌가. 아빠는 “밥 한 그릇만 있으면 되지 뭐~” 라고 했지만 굳건한 자기 취향을 지키는 것도 피곤했으리라는 예상만 할 뿐이다.


그런 아빠가 이제는 고기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 달라졌다. 정확한 시점을 콕 집을 순 없지만 내 마음대로 가늠해보자면, 엄마가 돌아가시기 몇 달 전, 우리가 처음으로 제주도로 가족 여행을 갔을 때다. 그 여행에서 동생 친구에게 추천받아 간 제주 흑돼지집에서는 숯불도 아니고 연탄으로 돼지고기를 구워먹는 곳이었다. 편견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모처럼 가족 여행을 온 터라 용기를 낸 아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뭉근하게 끓여낸 제주 젓갈에 듬뿍 담가 먹은 돼지고기에서는 잡내는 물론이고 아빠가 싫어하는 냄새가 하나도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뒤로 내가 가끔 집에서 고기를 구우면, 아빠도 조금씩 맛을 본다. 물론, 여전히 고기를 1센티 정도로 잘게 잘라서 술과 함께 먹어야 하지만, 아빠의 입맛에도 변화가 온 셈이다.


아빠의 까다로운 입맛과 취향이, 나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다는 걸 깨닫는다. 아빠가 고기 하나를 먹을 때도 자신의 철학과 취향을 반영하는 것처럼, 나도 어느새 나만의 기준을 세우며 살고 있다. 그동안 무심코 넘겼던 아빠의 선택들, 그 모든 것이 나에게도 스며든 것 같다. 나 역시 아빠처럼, 나 자신을 돌보며, 내 취향을 존중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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