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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쌤 류민정 Oct 16. 2024

다섯 번째 주말, 일기장이 살아 있다

우리 집에는 내가 어릴 때부터 쓴 일기장이 한 박스 있다. 아빠가 내 일기장을 모아놓고 꼭 책으로 엮어주겠다고 말한 지도 벌써 30년이 훌쩍 넘었다. 일기를 쓰기 시작한 초등학교 시절부터 아빠는 늘 나에게 말했다. “이건 나중에 책으로 꼭 내줄게.” 나는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사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설레곤 했다. 어쩌면 내 글이 정말로 책으로 나올 수 있다는 기대감! 그리고 내가 쓴 글을 제삼자가 읽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빠 왜 그랬어... 


지금 그 일기장들은 고스란히 박스 안에 쌓여있다. 책으로 엮이지 않은 채 말이다. 아빠의 호언장담은 지켜지지 않았고, 먼지 쌓인 박스 안에서 오래된 종이 냄새를 풍기며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 나는 가끔 그 박스를 보며 아빠에게 장난스럽게 “왜 나 책 안 내줘~”라고 타박을 하곤 한다. 꼭 내준다고 장담하던 아빠는 언제부턴가 그냥 멋쩍게 웃기만 한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그 박스가 그저 일기장이 쌓여 있는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먼지와 함께 쌓여 있는 그 일기장이 나에게는 일종의 오래된 연료처럼 느껴진다. 마치 토이 스토리에서 살아 움직이는 장난감들처럼, 나의 일기장들도 내가 없는 사이에 뛰쳐나와 나에게 에너지를 주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게 혼자만의 상상을 해본다.


일기장 속에는 나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글쓰기의 흔적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 글쓰기는 아빠와 함께한 두 번의 백일장 기억과 맞닿아 있다.


첫 번째 백일장은 초등학교 때 세종대왕을 기리기 위한 한글날 백일장이었다. 글쓰기 대회를 위해 집에서 멀리 떠난 건 처음이었다. 사실 그때 나는 학교에서 다른 아이들이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대회에 나가는 것이 괜한 오버가 아닌가 싶어 긴가민가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아빠는 아니었다. 마치 자신이 참가하는 것처럼 “잘했다!”며 나를 응원했고, 아침 일찍부터 아빠와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아빠와 함께 백일장에 가는 길은 마치 무언가 대단한 모험을 하러 가는 것 같았다. 아빠가 일부러 그런 태도를 보인 것인지, 아니면 그게 그냥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아빠의 자신감 덕분에 나도 그 모험에 동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기대감으로 가득 찬 채 첫 백일장에 도착했다.


백일장에서 주어진 시제는 '사진'이었다. 아직도 그 순간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아빠는 사진이라는 주제가 나오자 신이 나서 나에게 사진의 중요성과 그 매력에 대해 열정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아빠의 설명을 들으니 나도 마치 사진 전문가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사진을 찍는 한 남자의 꿈에 대한 글을 적어 내려갔다. 그 글을 본 아빠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이건 1등이야!”


아빠의 확신은 나에게도 전해졌고, 나도 내심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상을 받지 못한 나는 처음으로 글쓰기 대회의 냉정함을 느꼈다. 그러나 아빠는 여전히 나의 글이 최고라고 말해주었다. 지금까지도 아빠는 그때 내가 쓴 글이 1등이라고 믿고 있다. 아빠의 그 믿음 덕분인지 나는 그다음에도 계속해서 글을 쓸 수 있었다.


두 번째 백일장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그때는 문예창작과 진학을 꿈꾸며 진지하게 글쓰기를 고민하던 시기였다. 이번에는 대학 백일장이었다. 그날도 아빠는 나를 응원하며 함께 대회장으로 향했다. 초등학교 때 이후로 처음 참가한 큰 대회라 긴장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설레고 신이 났다. 내가 글쓰기 대회에 참가하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새로운 곳에 가는 것에 대한 기대감, 호기심이 나를 지배했다. 이건 단순히 나의 성격만은 아니었다. 아빠와 나를 이어주는 공통된 성향이기도 했다.


대회장에 도착하자, 그곳은 정말 신세계였다. 수백 명의 학생들이 각자의 교복을 입고, 각자 자기 자리에서 글을 쓰고 있었다. 책상 위에서 들려오는 연필 쓰는 소리가 사방을 가득 메웠고, 그 소리는 나를 자극했다. 마치 내가 더 잘 써야 한다고 재촉하는 듯했다.


하지만 결과는 또다시 기대와 달랐다. 나는 상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1등을 차지한 친구의 글이 낭독되는 순간, 나는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 친구는 나와 같은 고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하필 그 해가 이례적으로 고3이 아닌 고2 학생에게 1등 상을 준 해였다. 그 글이 낭독되는 동안 나는 내 글과 그 친구의 글을 비교하며 스스로를 자책했다. ‘대체 어떻게 저런 글을 쓸 수 있지?’ 하지만 그 충격은 오랫동안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그날의 경험 덕분에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나도 저렇게 잘 쓰고 싶다. 상을 받고 싶다. 글로 대학에 가고 싶다!’ 그날 이후로 나는 승부욕에 불타올랐다.


이 두 번의 백일장은 내 글 생활에 있어 일종의 전환점으로 남아있다.


두 백일장의 기억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아무 상도 받지 않았다는 것과, 아빠가 함께했다는 것이다. 결국 내가 진지하게 글쓰기를 향해 나아가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이유에도 역시나 아빠의 존재가 있었다.


다시 일기장 이야기로 돌아와서.


수많은 이사 속에서도 방 한켠에 고이 놓여 있는 일기장 한 박스. 그 박스는 마치 우리 집의 터줏대감처럼 자리하고 있다. 그 속에는 아빠의 약속과 나의 기대가 뒤섞여 있다. 마치 말 많은 도깨비가 그 안에 숨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빠가 나에게 해준 말들, 그리고 그 말을 믿고 쓴 나의 글들이 그 일기장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책으로 엮이지 않아 오히려 다행인 일기장 박스가 아빠의 응원과 나의 글쓰기 여정의 증거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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